광개토왕비

여러이야기 2016. 1. 1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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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작, 전쟁도 불러온다

광개토태왕비의 사라진 세글자


광개토태왕비(호태왕비好太王碑)는 서기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비이다.

수백 년 세월을 압록강 건너 편 중국의 지안[集安] 땅속에 묻혀 있던 이 비는 큰 비가 와 흙이 대거 쓸려나간 후 돌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비에 비해 워낙이 크고 웅장했던 이 비는 표면이 무척이나 거친 데다 높이는 성인 네 사람 키 정도로 탁본 뜨기가 매우 어려워 북경에서도 희귀품으로 거래되었다.

어느 날 이 비의 탁본이 일본의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헌병 중위)에 의해 일본 본토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때였다.

군국주의자들에게 가게노부가 가져온 탁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곧 이를 통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조작해내게 된다.

'임나일본부
(任那日本府)'란
무엇인가?



광개토태왕비. ⓒ 김진명

일본에는 7세기 경 편찬된 <일본서기>라는 책이 있다.

그 책 속에 과거 일본이 '임나'라는 나라를 지배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들은 바로 이 '임나'를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 기사에 끼워 맞춘 것이다.

문제가 되는 신묘년 기사 부분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이육년병신왕궁솔수군토벌잔국)

동그라미 표시된 저 세 글자는 비에서 지워졌는데 세 글자 중 마지막 자에서 근(斤)이 보이기 때문에 신(新) 자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 놓고 보면 이 구절은,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이 두 글자에 임의로 '임나'를 끼워 넣고는 이렇게 해석한다.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호태왕은 즉위 6년째인 병신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

도대체 저기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두 글자를 임나라고 써넣을 생각을 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저렇듯 보이지 않는 두 글자를 '임나'라고 써넣고는 자국민들을 교육시켜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 진위를 의심받는 역사책 속에나 존재했던 나라 임나는 한반도 안에서 백제, 신라와 같이 어우러져 있었고 일본은 이곳 임나에 '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한국 사학자들의 반격

이러한 억지 주장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이 확실한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했던 것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무엇인가를 격파했다는 저 구절의 한자 해석이 문법이나 문장구조상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왜가 주어가 되면 파의 목적어는 백제, ○○, 신라가 된다. 한국 학자 중에는 목적어 ○○는 임나가 아니라 가야라고 해석하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 이조차 있었다)

여하튼 한국의 사학자들이 별다른 대응을 못 하고 일본은 전후에도 교과서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전국민에게 교육시키던 중, 뒤늦게 재일(在日) 사학자인 이진희 씨가 놀라운 발표를 한다. (1972년)

일본이 광개토태왕비에 석회를 발라서 글자를 조작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른바 '석회도말론'이 그것이다.

그동안 일본의 억지 주장에 제대로 대응 한번 못 하고 있던 한국의 사학자들은 그러한 발표가 나오자 환호성을 터트렸다.

한국의 신문에서도 이 기사를 1면 톱으로 보도하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오랜만에 질타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문이 쏟아지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알 만한 유명 사학자 대부분이 동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가 최인호 씨는 이를 바탕으로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소설을 쓰고 '조선일보'는 그것을 연재할 정도였으니, 적어도 한국에서는 석회도말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석회도말론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진희 씨는 여러 장의 탁본을 비교하며 來渡海(래도해)의 세 글자가 탁본마다 조금씩 다르니 일본인들이 석회를 발라 조작해냈다고 주장했지만, 석회는 우리 모두가 잘 알듯 물에 잘 녹는다.

백 년 전 석회를 발라 조작을 한 것이 비가 많이 오는 그 지역에서 아직도 건재하다는 주장을 나로서는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한중 수교가 되어 중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마자 바로 지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직접 광개토태왕비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땐 지금처럼 차단시설이나 감시 따위가 없어 비의 표면을 하루 종일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일본이 글자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때로부터 이미 백 여년 세월이 흐른 뒤였음에도 '來渡海(래도해)'라는 세 글자는 그야말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석회도말론'은 엉터리였던 것이다.

그즈음에도 한국에서는 '석회도말론'을 바탕으로 한 논문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던 터였다.

그러한 주장은 오히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 측 주장대로 석회를 발라 조작한 적이 없으니 조작 사실이 없다는 강변만으로도 손쉽게 역사 왜곡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찾겠다는 결심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난 뒤, 비 앞에서 진실을 찾겠다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비와 관련된 남한, 북한, 일본, 중국의 자료와 서책들을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 모든 연구자의 머릿속을 다 들여다보면 안 보이는 두 글자를 유추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집념으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던 내 눈에 마침내 호태왕비의 중국 측 권위자인 왕건군(王建群)의 저서가 눈에 들어왔다.

 왕건군은 자신의 책 말미에 참고자료들을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싣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속에 경천동지할 광개토태왕비의 저본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저본은 어떤 변화가 있기 전 맨 처음 보이는 그대로를 기록한 걸 말하는데 흔히 초본, 혹은 초록이라고도 한다.

어떻든 수많은 다른 책 중 한 권이겠거니 하며 펼쳐 든 그의 책 부록에 기적처럼 저본이 붙어 있었고 저본에는 안 보이는 글자 중 첫 자가 동녘 동(東) 자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비문. ⓒ 김진명
그렇다면 이 저본은
어떻게 남게 되었을까?

저본은 초균덕(初均德)이라는 이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그는 별명이 초대비라 불릴 정도로 광개토태왕비를 끼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 세상에 나온 광개토태왕비가 짙은 이끼에 덮여 탁본을 하기가 힘들자 비에 말똥을 발라서 태워버렸고, 이 탓에 비는 표면이 갈라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유실된 글자들에 더하여 추가로 여러 글자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그는 비를 태우기 전 그때까지 보였던 글자들을 종이에다가 한 자 한 자 또렷이 옮겨 적어 두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본을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조카딸에게 맡겼고, 이것이 50년 이상 그녀의 다락방에 두터운 먼지를 쓴 채 방치되었다가, 초균덕의 가계를 추적했던 왕건군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내 그의 저서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왕건군은 한일 간에 비의 해석을 두고 처절한 전쟁이 붙어 있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 저본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각종 저서에서 문제의 그 구절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으면서도 이 저본에 있는 가장 결정적 한 글자 '동'을 언급하지도, 그 저본에 따라 해석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저서 부록에 여러 잡다한 자료와 함께 이 저본의 필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그의 행태로 보아 실수라고 밖에는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안 보이는 두 글자 중
첫 글자가 東(동)이라면
비의 해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일본은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 백잔임나신라 이위신민'이라고 해서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임나' 자리에 '동'이 들어간다면 그런 해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동으로 시작되는 나라는 없으므로 주어는 자연히 백제가 되어버리고 동(東) 다음에는 정(征), 벌(伐), 침(侵) 등의 동사가 온다.

즉 '백제가 동으로 신라를 쳐서 신민을 삼았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구절 '그래서 병신 6년에 대왕(광개토태왕)은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이 아닌) 백제를 토벌했다'와 꼭 맞아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東(동) 자 하나만으로도 일본의 임나일본부 조작이 드러난 셈이었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그걸 섣불리 발설할 수가 없었다.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제법 알려지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일개 소설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사라진 글자 중 하나가 東(동) 자라고 주장한다 한들, 그러한 주장을 일본은 커녕 우리 역사학계조차 주목할 리 없었다.

하여 나는 이러한 주장을 한국과 일본 학계에 동시에 알릴 생각으로 <몽유도원>(원명 가즈오의 나라)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 <몽유도원> 본문. ⓒ 새움출판사

그리하여 마침내 東(동) 자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석회도말론'을 주장하던 논문들은 그 주장의 근거를 잃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연구 일인자와의 만남

소설이 나온 후 나는 이 東(동) 자를 가지고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연구 일인자를 찾아갔다.

그때 그는 동경대학교의 동양사 실장(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귀한 탁본을 다섯 장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봐란 듯이 탁본들을 바닥에 좍 깔며 도대체 어디에 비를 조작한 흔적이 있냐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비의 조작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견해에 동조했다.

어리둥절해진 그에게 나는 천천히 저본을 내밀며 東을 짚었다.

깜짝 놀라 저본의 글자들과 탁본의 글자 1,775자를 한 자 빠짐없이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저본의 신뢰성을 완전히 확인하고 난 그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온 인생을 바쳐 광개토대왕비를 연구해온 그에게 이 동의 출현이 크나큰 충격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한 후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학자란 진실 앞에 목숨을 거는 존재가 아닌가, 일본 최고 지성인 동경대학교 학장으로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연거푸 세 대의 담배를 피웠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입에서는 이윽고 회한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내가 기대한 이상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 임나를 집어넣는 건 맞지 않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데 내년부터 내 책에서 임나일본부를 빼고 다른 저자들에게도 권고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필두로 작년에 이르러 모든 일본의 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가 완전히 빠졌으니 이 허구는 생성부터 폐기까지 꼬박 130년이 걸린 셈이다.

임나일본부와 같은
역사 조작은
단순한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역사 조작이 무서운 건 이것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결국은 침략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군국 일본은 광개토태왕비를 악용해 임나일본부라는 말을 만들어냄으로써 자기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세웠고 이에 따라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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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wo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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