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10.26

여러이야기 2016. 1. 1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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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죽음,
배후는 누구인가?

한국현대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하루
연재일 : 2015.12.14 by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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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했다

당시는 내부적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등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던 때였다.

둘 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한미군 철수는 당시 남북의 군사력에 비추어볼 때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결국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해달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지미 카터가 뜻을 굽히지 않자 핵카드를 빼어든다. 북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핵무기뿐이니, 우리가 그것을 개발하겠다고 카터에게 타협을 시도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반란은 그즈음에 발생한다.

군사쿠데타의 2인자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체제 유지의 시금석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력의 수장은 언제나 대통령의 심복 중 심복이면서 모든 걸 바쳐서 대통령에게 충성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자라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의 수장이 대통령을 배신하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의 당시 발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안가의 소연회에서 당시 자리를 함께했던 경호실장 차지철로부터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 순간적으로 격분해 벌인 우발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합수부의 그러한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합수부 발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었을까?

우선 그날 술자리가 마련되기까지 김재규의 스케줄을 살펴보자. 김재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그날은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된 날이라서 대통령이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한 후 헬리콥터를 타고 귀경하던 중이었고, 경호실장 차지철이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대통령은 평소 궁정동의 안가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안가를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소연회를 준비하라는 차지철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연회 준비를 지시한다.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 모델 신재순을 프라자호텔로 불러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시킨다. 

그러고 나서 김재규는 매우 엉뚱한 전화 한 통을 건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정 총장, 오늘 나하고 저녁 같이 합시다."

궁정동 안가에는 건물이 여러 동 있는데, 김재규는 그중 한 동에 연회를 준비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옆 동에 정승화 총장을 초대했던 것이다. 대통령과 저녁 술자리가 잡힌 마당에 그는 과연 왜 육군참모총장을 부른 것일까?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에게 전화를 한다. 육군참모총장과 저녁약속이 있었는데 갑자기 각하의 소연회 연락이 와서 자리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자기 대신 나가달라고 한 것이다. 완전히 거꾸로 이야기 한 셈이다.

아무튼 그때 김재규는 왜 육군참모총장을 불렀을까? 그건 이미 김재규가 그날 저녁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모든 힘이 육군참모총장에게 가게 되어 있다.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이렇듯 준비된 행동에 미루어볼 때도 합수부의 '우발적 범행'이란 발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김재규는
과연 언제부터 이 거사를
준비했던 것일까?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김재규라는 사람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는지를 살피는 게 중요할 것이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심복 중의 심복이라 생각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김재규는 박정희와 180도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한다. 그는 "박정희의 핵개발은 미친 짓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요청에 의해서 박정희의 뒷조사를 해서 보고한 적이 있을 만큼 은밀하게 미국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던 터였다.

박정희가 핵개발로 미국과 타협을 하려하던 그즈음, 마침 CIA 국장인 터너가 김재규를 미국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때 박정희는 당연히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하는 데 CIA가 힘 써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김재규에게 지시한다.

그때 둘 사이에 오고간 밀담을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재규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워싱턴 정가에는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한 문서가 나돌기 시작하고, 북한이 남한에 비해서 무력이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에 당장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남한이 먹히고 말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가 <워싱턴포스트>에 특종으로 실리고 미국의 정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재규를 연구할 때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인물 중에는 스티브라는 자가 있다. 주한미군 중위로 한국에 부임한 CIA 요원 스티브는 미국에서 유창한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 터너는 미국을 방문한 김재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영어가 너무 서툴다. 속내를 나누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 좋은 사람이 있으니 영어 교사로 써라."

그때 터너가 김재규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이 스티브였던 것이다. 스티브는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수시로 미국 주요 인사들의 생각을 김재규에게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미국을 추종하는 김재규를 스티브는 더욱더 세뇌시키고 조종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김재규는 미국을 믿었고 미국이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사건 이후, 합수부의 심문을 받을 때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절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핵에 대한 이견 외에 김재규가 대통령을 쏜 이유를 하나 더 찾자면 그는 당시 사회상황에 대해서도 박정희와 완전히 다른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 그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선전하는 좌익이나 일부 불순 노동자, 학생만이 아니고, 일반 시민과 중산층이 가담한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항쟁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그는 "이대로는 큰일 난다, 박정희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가 김재규의
쿠데타 도상연습이다

나는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으로 있던 김학호 장군으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감찰실장 김학호는 당시 김재규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부장과 나는 순식간에 한국을 마비시키는 연습을 골백번은 했다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 150명가량을 밤새 연행하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실제 그 리스트를 뽑아서 직원들로 하여금 연행해 오는 도상 연습을 펼치곤 했던 거야. 그때 신호가 뭔지 아나? '김학호, 시작해'였네. 그 한마디만 내게 했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부장이 왜 뜬금없이 우리 집(중앙정보부)으로 오지 않고 육참(육군참모본부)으로 갔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네."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이고 나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같은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난다. 당연히 자신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을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으로 가야 할 터인데, 그는 중앙정보부 100미터 앞에서 차를 꺾어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 벙커로 간다. 

우선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간 박정희를 제거한 후 어떻게 한다는 계획까지 철저하게 짜두었던 그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김재규가 자기 본거지인 중정을 놔두고 육본 벙커로 갔다면, 그것은 이미 정승화와 입을 맞추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렇듯 목숨을 건 거사를 함께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인데, 두 사람은 결코 입을 맞춘 적도, 그렇듯 막역한 사이도 아니었다는 것이 이후 세상에 밝혀진 대로다.

그렇다면 김재규가
그 중차대한 시점에
중정이 아닌 육본 벙커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나는 정말이지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마침내 걸려든 정보 하나, 그것은 바로 김재규의 영어 가정교사 스티브가 문제의 10월 26일 밤 오산 미군 비행장에서 도쿄로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스티브는 실제든 부지불식간이든 김재규를 조종하고 컨트롤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10월 26일, 바로 그날 밤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이 내게는 결코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에 더불어 이제 정말 이 사태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을 나는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당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였던 존 천(John chun)이었다. 

그는 서울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CIA에 포섭되어 미국으로 가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CIA 본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첫 부임지인 도쿄 태평양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중에 한국에서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그때 그에게 떨어진 임무가 한국으로 들어가서 쿠데타 주동자인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박정희는 외부에서 봤을 때는 정말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 출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존 천은 한국으로 날아왔고, 바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이후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박정희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까지 보이면서, 그냥 두면 내 조국 대한민국이 정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에 오로지 나라를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애국심 하나로 봉기한 것이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 눈물의 진정성이 무엇이었든 그에 감동한 존 천은 "박정희는 좌익이 아니다, 빨갱이가 아니고 반공주의자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훌륭한 군인이다. 이번 사태는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벌인 일로 보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고, 결국 미국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용인했으며, 자신은 박정희의 은인 중 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존 천은 아예 한국으로 배속되어 주한미군의 첩보공작 부서에 있게 된다. 물론 뿌리는 여전히 CIA였지만, 는 차츰 승진을 해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가 된다.




한미 정보기관의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 존 천의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맨 왼쪽이 존 천, 가운데 중심인물이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다.

문제는 이 특별한 사람이 어쩐 일인지 10월 26일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9일 전격적으로 전역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당시 그의 행적이었다. 그는 10월 25일에 용산 미군 병원에 입원을 하고 10월 27일에 퇴원을 했는데, 10·26을 사이에 두고 전날 입원을 하고 다음 날 퇴원을 한 셈이었다.

병명도 간단했다
감기

나는 숱한 자료 조사 끝에 이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내 모든 인맥과 정력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마침내 그에게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의 소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에게 접근해 정보를 얻는 것은 정말이지 상식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했던 것이다. (원래 정보계통에 있던 사람은 재직 중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면 처벌받게 된다. 처벌보다 무서운 것은 연금이 박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일단 쌀 수입업자로 위장했다. 내가 한국에 라인을 가지고 있으니 캘리포니아산 쌀을 한국에 수출하자면서 접촉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업자와 무역상의 사이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만남 끝에 마침내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고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사람으로부터 10·26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존 천은 자신의 손으로 살린 박정희를 누구보다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그랬던 그가 왜 갑자기 전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냐고 묻자 그는 내게 '하우스먼' 얘기를 꺼냈다.

하우스먼은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주한미군의 터줏대감으로 한국 정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당시 한국 정치 경제계의 내로라하는 사람치고 이 사람과 연을 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 김영삼 등도 그와 연락하고 있었다고 한다). 존 천은 이러한 하우스먼과도 절친이었다는 것이다. 

그날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 미스터리한 3일을
재현해본다면..

10월 25일 하우스먼은 존 천에게 어디가 안 좋아 보인다고 말을 건넨다. 감기 기운이 좀 있다는 존 천의 말에 하우스먼은 "감기를 그냥 놔두면 몇 달씩 가니까 얼른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빨리 치료하는 게 나아"라고 권유한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존 천에게 예방 차원에서라도 한 대 맞으라며 거듭 권했고존 천은 급기야 부대 내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된다. 

그런데 존 천은 단지 주사를 한 대 맞았을 뿐인데, 깊은 잠에 빠졌고, 일어난 시점은 10월 27일 오전이었다. 이미 그때는 난리가 나서 부대가 뒤숭숭한 상태였다. 지난밤 대통령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존 천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로 하우스먼 사무실로 뛰어 들어간다. 그는 하우스먼의 책상을 다 뒤엎고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며 달려들었다. "미안해, 존 천 미안해. 용서해줘. 뭐든 얘기해, 내가 다 들어줄게" 하는 하우스먼에게 존 천은 "필요 없어, 이 개새끼야" 하며 곧바로 전역원을 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 왜 위와 같은 이상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일까. 존 천의 증언에 따르면 둘 사이엔 앞서 밀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우스먼은 만약 꼭 그래야만 한다면,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존 천한테 알려주기로 했고, 그러면 존 천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담판을 지을 기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우스먼은 그 약속을 저버리고 존 천을 잠들게 한 후 일을 치러버렸던 것이다. 

김재규가 마지막 순간 항상 쿠데타 연습을 같이했던 김학호 장군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우스먼 역시 마지막 순간 존 천을 잠재우고 일을 치렀던 것이다.

이제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김학호와 존 천, 그 둘이 각자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내게 털어놓았던 이야기까지 종합해보면 마침내 10·26의 배후가 보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좇은 모든 자료와 증언, 정황 증거로 판단해볼 때, 머리가 누구였건 미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김재규로 하여금 육본 벙커로 가도록 지시를 했거나 유도를 했고 (그 연락책이 바로 스티브였던 것),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김재규의 쿠데타는 실패하고, 그간 박정희에 의해 비밀리에 축적되던 모든 핵개발 기술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핵개발을 끝까지 강행하려 했던 박정희와 그걸 막으려 했던 미국과의 충돌. 그것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죽음의 본질이 아닐까?

이것이 풀리지 않는 10·26 당일의 미스터리에 대한 내 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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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wo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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