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 시해

여러이야기 2016. 1. 17. 00:03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2109


그날 아침,
경복궁에서 무슨 일이?

명성황후 최후의 비밀을 밝히다
연재일 : 2015.11.12 by 김진명
글씨 크기 조절하기

쓰노다 후사코 여사는 1914년 도쿄 출생의 논픽션 작가로 어느 것 하나라도 의심이 들면 글을 쓰지 않는, 철두철미한 작가로 유명하다. 2006년 그녀는 자신의 저술이 한국인의 친절 때문에 가능했다며, 책 판매 수익금 전액을 사할린 잔류교포에게 기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녀는 당시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임무는 일본인에게 역사를 반성할 기초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쓰노다 후사코 여사가 한국을 50번 이상 오가며 쓴 책이 <민비 암살>이다.

이 책을 읽던 당시 무엇보다 내 눈에 와서 꽂힌 구절이 있었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들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쓰노다 여사는 이 구절에 나오는 '괴로운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뭔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명성황후의 최후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경복궁에 있던 러시아인 기사 사바친과 궁중수비대 대장이었던 미국인 다이 장군의 증언이 있었지만, 그 둘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감금된 상태여서 직접적으로 문제의 현장을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한다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위안부 문제를 규탄해도, 그들은 그네들을 돈 때문에 자발적으로 군부대를 따라다닌 몸 파는 여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숱한 징용자들에 대해서도 월급명세서를 내보이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온 자발적 근로자라고 우긴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를 대표로 한 정계, 교육계, 언론계가 개입되어 있기에 그러한 교육을 받은 일본 국민들은 우리가 위안부나 징용을 지적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소 저들이 발뺌할 수 없는 팩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민비 암살>의 저 구절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988년에 발간된 <민비 암살> 원본(좌)과 2001년 발간된 <황태자비 납치사건>(우) ⓒ새움출판사

우선 나는 <민비 암살>을 번역한 한국교원대 김은숙 교수를 통해 쓰노다 여사에게 그 구절의 의미와 출처를 물었다. 그녀로부터는 어렵사리 사간(死姦)이라는 말이 돌아왔지만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쓰노다 여사를 압박했고, 쓰노다 여사는 마지못한 듯 7~8권의 자료들을 열거해주었다. 나는 여사가 불러준 책들을 전부 구해 꼼꼼히 살폈지만 더 이상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이분이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후로도 나는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으나, 그녀를 설득할 수도, 그 출처를 찾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쓰노다 여사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내용을 어디에서 보긴 했다는 것이니, 어딘가에 분명이 있긴 하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출처를 찾기 위해 그 방면의 책들을 섭렵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일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가 쓴 <일한병합소사>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시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민비를 참살하고 시체를 능욕했다

쓰노다 여사의 '사간'이 여기서는 '사후 능욕'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 말은 결국 같은 말이었고, 나는 그 구절에 달린 주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이토 백작 문고"

나는 즉각 전화기를 들어 일본의 대학에 봉직하며 나를 돕던 K 교수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자라 일본의 외교사를 전공하는 그는 나의 부탁으로 멀리 후쿠오카까지 오가며 쓰노다 여사가 일러준 자료들을 찾아 살펴왔고 이제는 나 못지않게 그 원전을 찾으려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내 전화를 받은 그는 그길로 달려가 그토록 애타게 추적했던 원전을 찾아내 사본을 팩스로 보내왔다. 1895년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던 밀서가 106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순간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에조 보고서'라 이름 붙은 저 문건을 입수하게 된 경위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에조 보고서'는 무엇이었던가

이 에조 보고서는 당시 조선 정부 내부 고문관으로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실행자 '미우라 공사' 몰래 자신의 직속상관인 일본 정부 법제국 가네즈미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여기에는 '민비 사건'의 발단부터 명분, 모의자, 실행자, 외국 사신, 영향 등이 일본 고어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보고서의 첫 문장이 "미우라 공사에게는 배신의 극치이지만.."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곧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낸다는 뜻이며, 따라서 어떠한 조작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한 셈이다.

"낭인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칼로 두세 군데 상처를 입히고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습니다. 우스우면서도 분노가 치밉니다.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했는데 이 광경이 너무 참혹하여 차마 쓸 수가 없습니다. 궁내대신 또한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野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體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_<이시즈카 에조 보고서> 중에서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본의 만행 역시 원전을 보자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도 잘못되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보고서를 근거로 낭인들이 '민비'를 참살하고 그 시체를 능욕했다고 했는데, 이 원전에는 보다시피 "칼로 몇 군데 상처를 내고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했다"고 적혀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행해진 끔찍한 만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부검사라는 이 한 단어에서 그 실태가 어떠했으리라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과거의 역사를 한스러워 하는 쓰노다나 진보적 역사학자 야마베조차 이 끔찍한 만행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어 '사후'라는 해석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기술한다. 민비를 비롯한 민씨들이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를 가까이하므로 일본으로서는 민비를 제거할 정치적 필요성을 느꼈다는 식이다.

하지만 다 타지 않고 남겨진 국모의 유해가 경회루의 연못과 우물에 버려져 유실됨으로써 2년 후 장례조차 빈 관을 놓고 치러졌다는 슬픈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어떠한 정치도, 외교도 없었던 것이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외국의 정부와 사절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 이하 경복궁에 난입한 39명 전원을 체포해 히로시마 형무소에 가두고 재판을 열었다. 그 재판은 물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고 살해범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이제 이 사건을 우리나라 검찰에서 기소하고, 우리나라 법정에서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리적으로 불가하다 넘길 일이 아니라 이러한 진상을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알려 온갖 논리로 호도되고 있는 <조선 진출>의 본질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진명

덧붙이자면, 나는 이를 주제로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썼었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읽고 격려해주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일본인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었다. 일본인 중에도 이런 사실을 알기만 하면 누구보다 앞서 반성하고 사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일본에서의 출판을 추진했었지만 그것은 결국, 번역까지 마쳐진 상태에서 우익의 협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NHK는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소개하는 칼럼을 싣는 것만으로도 하타 전총리와 뭇 언론으로부터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한일 간의 올바른 역사를 저들에게 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작없을 끝없이 이어가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과거사의 정리이며 다음 세대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다.  


'여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자의 역사  (0) 2016.01.17
1973.10.26  (0) 2016.01.17
광개토왕비  (0) 2016.01.16
국호 韓'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0) 2016.01.16
접촉으로 성별이 바뀌는 생물  (0) 2016.01.11
Posted by TwoTen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