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역사

여러이야기 2016. 1. 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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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연재일 : 2015.12.28 by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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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발굴단이 현지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랫동안 숱한 수수께끼를 뿌려왔던 산둥 안양현에 위치한 은허의 발굴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발굴단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베이징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유수의 대학에서 선발된 고고학 및 인류학, 역사학 교수들과 연대측정 전문가들, 서지학자들, 심지어는 인골 감정 전문가들까지 망라된 대규모 발굴단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뉴스를 연일 숨 가쁘게 토해냈다. 모든 뉴스 중 압권은 단연코 하루가 다르게 3천 년 이상 덮어쓰고 있던 흙을 털어내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고대의 글자였다.

갑골문

거북이 등껍질과 소 어깨뼈에 쓰인 수많은 글자에 발굴단은 아연 경악했고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중에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하늘 천(天), 사람 인(人), 임금 왕(王) 같은 글자도 있었고 동녘 동(東)이나 가을 추(秋)와 같이 좀 복잡한 글자도 있었지만, 출토된 글자는 분명 한자였고 그중 수백 자는 누구나 첫눈에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발견된 갑골문.
은(殷)

중국의 고대 문헌상에서만 존재하던 나라 은은 분명 실재했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한자는 이미 5,000자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위대한 황하 문명의 실체에 모든 중국인들이 들떠 환호하고 있을 무렵, 정작 은허의 발굴지에서는 한 무리의 전문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출토된 수백 수천 개의 해골 더미 옆에서 고심하고 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인골전문가들이었다.   

"동이(東夷)!"

해골로 본 은허의 주인공들, 즉 은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천만뜻밖에도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재직 시절 대만에서 중국의 문호 임어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안 장관은 당시 한글전용이냐, 한자병용이냐로 시끄럽던 국내의 상황을 빗대 이와 같이 농담을 던졌다.

"임 선생, 당신네 중국인들이 한자를 만들어 우리까지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그러자 임어당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한자는 당신네 한국인들의 조상 동이족이 만든 건데 아직 그것도 모른단 말씀입니까?"

사실 임어당뿐만 아니라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개가 한자의 주인공을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라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 근거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허의 발굴, 즉 고고학에서 찾고 있다.

인골 외에도 은허에서 출토된 반월형 동검이라든지 회색 토기, 그리고 무엇보다 묘제, 즉 사람을 장사 지내는 방법은 은나라가 동이족의 문명이라는 걸 확고히 보여준다. 묘를 만드는 방식은 부족마다 고유한 데다 오랫동안 바뀌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묘제를 문명 구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고 있는데, 은이 존재했던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동이족의 석관묘와 한족의 목관묘가 대표적 장묘방식이었다.

그런데 은허에서 출토된 묘는 죄다 석관묘였으니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은나라를 동이족이 건국한 나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학계로서는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라 은허 발굴 이후 깊은 침묵과 고뇌가 이어졌지만 양심적 학자들이 자신의 소신에 따라 연속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해 동이족이 동북쪽에서 내려와 기원전 1,500년 무렵 은나라를 건국하여 약 5백 년간 살다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자신들의 고향인 동북쪽으로 되돌아갔다는 동이의 은나라 건국설은 지금 와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이족의 뿌리

사실 은의 주인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 이전에도 드물지 않게 기록에 의해 주장되고 있던 터였는데, 사마천 또한 그의 저작 <사기(史記)>에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족(華族)의 나라이다, 또한 동이는 대륙의 동쪽에, 화하는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하며 한족의 주나라가 먼 거리를 이동해 동이족의 은나라를 멸망시켰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인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동이족은 어떤 뿌리를 가진 사람들일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로 문명을 이룬 인류 중 일부가 조금 서쪽으로 이동해 이집트 문명을 이루었고 차츰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인더스, 갠지스 문명을 이루고 다시 조금 더 동쪽으로 이동해 황하 문명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4대문명론이다.

그러나 이 4대문명론은 최근에 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최근에 뚜렷이 드러난 '요하 문명' 때문이다.

중국 요양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요하 문명의 주인공은 황하 문명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의 이동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 직접 이동해왔고 그 시기도 황하 문명보다 빨랐다고 하는 것이 요하 문명의 요체이다.

즉 인류의 이동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진한 사람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 북으로 올라가 시베리아를 걸어 동진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바이칼 호수를 거쳐 북중국과 만주, 한반도, 일본 열도에 정착했고 일부는 베링을 지나 아메리카 인디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동이족은 거의 모두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고 우리 한국인들은 동이의 현존하는 후예로서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밝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동이족이 한자를 발명했음에도 지금에 와서 한자는 당연히 한족의 글자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동이족의 나라 은은 어째서 한족의 나라로 수천 년 동안 여겨져 왔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공자는 본래
은나라 유민의 후예

물론 심대한 역사왜곡이 있었고, 그 왜곡의 한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성인 공자(孔子)이다. 사실 일본의 식민사관보다 무서운 게 중국의 춘추사관인데 세상을 오로지 한족 중심으로만 보는 춘추사관을 확립한 사람이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컬한 건 동이족의 은나라를 한족의 주나라와 같은 뿌리로 합쳐버린 이 공자가 본래는 은나라 유민의 후예라는 점이다.

공자가 은나라를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나라로 보고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절규와도 같은 그의 두 마디 고백을 생각해보면 은나라와 주나라 사이에서 그가 겪었던 정체성의 고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본래 은나라 사람이다(予始殷人也)."

공자가 말년에 한 말인데 그가 은나라와 주나라를 같은 종족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나오기 힘든 고백이다. 또한 그는 젊은 시절 주나라 수도 낙양을 가보고는 감동하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련다(吾從周)!"고 결심한다. 이 역시 은나라 유민으로서 핏줄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이냐의 고뇌를 담은 한마디 절규이다.

방황 끝에 마음을 정한 공자는 자기 이전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고대사를 자의적으로 편집해 <서경> <춘추> 등의 역사서를 남겼다. 그의 역사관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데 치중하기보다는 확고부동한 자신의 시각에 따라 사건을 배열하거나 만들어내기조차 한 걸로 보인다.

특히 왕조의 흥망과 관련해서 그의 심한 왜곡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중심사상인 충(忠)이 갖는 현실적 모순 때문이다.

백성은 군주에게 충성해야 하는데 만약 군주가 자질이 엉망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매우 고심했다. 자질이 되고 안 되고를 신하든 백성이든 군주에게 충성해야 할 사람들이 판단한다면 충이란 사상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오랜 고심 끝에 유학이라는 현실적 학문에 신(神), 즉 하늘을 접목시켰다.

신하와 백성은 군주의 자질이 엉망일 경우에도 충성해야 하며 정말로 형편없는 군주는 하늘이 천명을 내어 교체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망하는 나라의 임금은 반드시 엄청난 학정을 펴는 폭군이고 폭군을 축출하는 사람은 천명을 받은 성군이라는 패턴을 만들어 자신이 편찬한 사서에 펼쳤다.

이 패턴에 따라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천하절색의 요부 말희에 빠져 국정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이어야 했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 역시 악녀 달기에 미혹돼 주지육림의 학정을 편 자라야 했다. 하나라를 멸망시킨 탕과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성군으로 기록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대사의 왜곡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역사상 최고의 군자로 보고 주나라를 너무 좋아했던 공자에게 한족의 나라 주나라보다 이민족의 나라 은나라가 5백 년이나 앞서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문젯거리였다. 나라의 창건을 하늘의 뜻으로 본 공자는 국가의 권위와 정당성을 '오래된 것'에서 찾았는데 대륙에 최초로 만들어진 나라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은나라와 주나라를 같은 종족으로 합치는 길을 택해 동이족의 나라 은나라는 주나라와 혈통이 같은 나라, 즉 한족의 나라로 둔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편찬한 <서경>에 나오는 '화하만맥 망불솔비(華夏蠻貊 罔不率?,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니 한족 동이족 할 것 없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기록은, 비유하자면 '왜가 조선을 치니 왜인, 조선인 할 것 없이 모두 기뻐하며 따랐다'는 것과 똑같으니 왜곡의 정점을 찍었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을 무한 존경하면서도 스승의 역사기록은 믿지 않았으며 자공은 '은나라 주왕이 그리 폭군은 아니었던 듯하다'는 표현으로 스승을 거역했으며 심지어 맹자는 '<서경>을 믿느니 차라리 없음만 못하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공자의 왜곡을 비판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고대사의 왜곡과 관련하여 공자라든지 중국인들만을 원망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운명적으로 춘추사관에 의해 역사왜곡을 당하게만 되어 있는 절대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록한 우리 자체의 역사서를 모조리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후기인 고구려를 기록한 종이 한 장, 대나무 한 조각, 우피지나 양피지 한 편조차 이 땅에는 남아있는 게 없다. 이문진이 편집한 역사서 <신집>은 어디에 있으며 <유기> 백 권은 어느 땅에 묻혀 있단 말인가.

고구려가 이럴진대 그전의 역사는 어떻겠는가.

실상이 이러해 모든 기록을 한족중심사관으로 도배된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의 온전한 옛날 모습을 알아낸다는 건 지난하다. 하지만 모든 길이 꽉 막힌 것만은 아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진정한 문제점은 과거의 기록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이 사회의 역사의식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5백 년간 이웃 나라인 중국을 하늘로 보는 춘추사관, 이어진 일본의 지배와 식민사관, 그 후 군사독재를 겪으며 우리는 성숙한 문화적 내면적 의식을 크게 상실하고 현실적 가치에만 눈이 먼 채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있다.

"돈이 최고"라든지 "돈 없으면 죽는다"는 등으로 표피적 현실에만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와 역사는 눈앞의 물질보다 오히려 삶을 훨씬 값어치 있게 하고 자신감을 북돋운다. 또한 사물을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는 길들여진 의식을 벗어나 자각과 이성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지구인 모두가 신뢰하는 <과학>의 눈으로 은나라를 보고 은자를 볼 것이냐, 아니면 공자의 제자들조차 부정하는 <춘추>의 눈으로 주나라를 보고 한자를 볼 것이냐는 질문은 목마르게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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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wo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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