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여러이야기 2016. 1. 17. 00:18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923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죽었을까?

함흥차사의 비밀
연재일 : 2016.01.11 by 김진명
글씨 크기 조절하기

아주 오래전 일이다.

오랫동안 글을 떠나 있던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찾은 곳은 오대산 기슭이었다. 처음에는 아예 월정사든 상원사든 절에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오대산을 찾아갔지만 막상 절에 당도해 이모저모를 생각하는 사이 내 마음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절에 잘못 들어갔다가 글이 잘 안 된다면 그때는 감옥생활과 다름없을 것 같았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가끔 술도 마셔야 하고 때로는 고기도 먹어야 하고 어쩌다 편안한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얘기도 주고받아야 하는데, 요사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 종일 절체절명의 고독만을 마주 대하고 있어야 한다면 글은커녕, 내 자신이 폭발해버릴까 봐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모양은 좀 그랬지만 나는 결국 민박집에 둥지를 틀기로 결심하고 그중 좀 외떨어지고 분위기도 조용해 보이는 민박집 하나를 골라 아예 석 달 치 방값을 선불로 지불해버렸다. 별로 손님이 없던 시즌에 석 달 치 방값을 한꺼번에 내놓자 주인은 나를 칙사처럼 대접했다. 나는 주인의 배려로 그 집 아들이 쓰던 책상을 하나 얻어 그 위에 노트북을 놓고 앉았다. 

그 무렵은 IMF가 닥쳐 사람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때라 나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한편, 곧 닥칠 증권시장 개방에 따른 국제 핫머니의 위험을 알리고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을 쓰려 했다.

그러나 그런 경제소설은 대중이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어떤 방법으로 소설을 쉽게 풀어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월정사 부근의 산길을 산책하며 다양한 플롯을 생각했다가 허물어버리길 수없이 했는데,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제소설을 쓴다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진리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보려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쓴 책이라면 그게 어떤 분야를 다루는 것이든 모두 다 읽어보자는 집념으로 몇 년간 미친 듯이 책을 읽었던 적도 있었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오직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끝없이 나 자신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자연과의 교감 상태를 넘어 주화입마 직전까지 가기도 했는데, 나는 선지식이 없는 정신 공부는 위험하다는 생각 끝에 그런 쪽을 접은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산사 주변에서 사람을 피한 채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어느새 내게는 젊은 시절의 그 신기(神氣)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나는 어느 때는 민박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에서 밤을 새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다 보니 현재의 어려운 나라사정을 걱정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를 관통해온 나라의 운명 같은 걸 더듬어보게 되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리에는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 끝이 안 좋았다는 생각이 스쳐 갔고, 그러다 보니 나라의 힘이 모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조선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든 대통령이든 끝까지 잘된 지도자를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보던 나는 왕권이나 정권을 둘러싼 나쁜 전통이 우리 역사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나는 부인을 흉탄에 잃고 자신 역시 변사한 박정희 대통령부터 시작해 일인들에게 불태워진 명성황후, 뒤주 속에서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삼촌에게 죽은 어린 단종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시작했는데, 유독 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나의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태조 이성계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기를 뻗칠 리가 없는지라 그 이상한 기운이 무엇인지 의아해하며 석연치 않은 의구심을 품은 채 영혼을 달래는 기도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는 밤이 깊도록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물론 빈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때 불현듯 뇌리를 스쳐가는 한마디가 있었다. 

"함흥차사."

나는 비로소 그 순간
태조 이성계의 한(恨)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분노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정종에 이어 왕이 된 태종(이방원)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들을 보냈지만,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여서, 한번 함흥에 차사로 가면 감감무소식이 된다는 데서 생겨난 고사였다.




보물 제931호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나는 그 고사 속의 비밀을 훔쳐본 셈이었다.

나는 종교나 무속에서 얘기하는 영혼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이 있고 억울한 사연도 있는 법이다. 상대에게 영혼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억울함이나 한을 풀어주는 것은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로부터 다시 하루 온종일을 함흥차사에 얽힌 비의를 생각하다가, 짐을 꾸려 돌아와서는 <조선왕조실록>을 확인했다. 비록 왕조실록은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대로 이성계는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최후는 함흥차사라는 이야기로 500년 이상 덮여왔고, 따라서 그의 한은 너무나 오랫동안 풀어지지 못한 채인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마침내 그로부터
구성의 영감을 얻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IMF 위기로 도탄에 빠진 사회를 위해 뭔가 힘이 되는 소설을 쓰고자 했던 나는 그에 더해 태조 이성계의 한을 풀어주는 것을 접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하늘이여 땅이여>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함흥차사의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함흥차사란 무엇인가요?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죽인다는 것인데, 그 궁극적인 뜻은 결국 함흥에 가면 죽는다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과연 누가 죽일까요? 이태조가 죽일까요?"

"명궁인 이태조가 활을 쏘아 죽인다는 것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아들한테 붙잡혀 함흥에 유폐당한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활을 쏘아 죽인다구요? 사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친구와 부하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오히려 사람이 그리웠을 이태조가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어야 할 사람들을 죽인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정확한 뜻은 이방원이 보내는 사신만을 죽인다는 것 아니오?"

"왕이 자신의 부친이자 태상왕인 이태조에게 보내는 사신이라면 미관말직의 관리였을 리 없습니다. 조정의 원로이거나 적어도 당상관의 벼슬은 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실록에 혹은 어느 역사 기록에 이태조에게 사신으로 가서 죽었다는 관리들의 이름이 있던가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태조에게 보내는 사신 중에는 이성계의 친구이거나 부하이거나 따르던 사람도 많았겠지요. 그들을 모두 죽였을까요? 아니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사신의 목적으로 왔다고 하면 가는 길에 활을 쏘았을까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예요. 함흥차사는 말로만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신은 없는 것이 그 증거죠."

"그렇다면 어째서 함흥차사란 얘기가 생겨났다는 거요?"

"사람들이 함흥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즉, 이태조를 찾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란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흥에 가는 사람은?"

"죽는 거지요."

"이태조가 아닌 이방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요?"

"바로 그렇지요. 그게 함흥차사에 숨어 있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태조를 음해했다는 것인데, 조선 500년간, 아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그 함흥차사란 말에 의해 속아왔다는 말이오?"

"그렇지요. 이방원의 쿠데타 이후 태조는 죽는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을 겁니다."

_<하늘이여 땅이여> 중에서

누군가는 이 가설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아니 처음으로 이러한 주장을 펼쳤던 1998년 초까지만 해도 저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후부터 당대를 다루는 여러 역사드라마에서 저러한 나의 주장에 맞게 태조와 태종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태조실록>은 이방원의 심복 하륜이 이미 손을 댄 데다가 세종 8년에 그 쿠데타 부분을 다시 한 번 고쳐 썼기에 당시의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든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던가.

현대사에도 유사한 예가 있다.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을 백담사에 유배시켰다. 사람들은 누구도 백담사에 유폐된 전두환을 쉽게 찾아가지 못했다. 권력에 의한 유폐란 필연적으로 방문금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늘상 다닌다면
그건 더 이상 유폐가
아닌 것이다

함흥차사란 말을 보면 유폐의 냄새가 짙게 난다.

그 비의는 이성계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폐의 전형인 셈이다. 당시의 유교 사회는 충과 효가 으뜸의 가치인데, 이방원은 자신이 아버지를 함흥에 유폐시킨 채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를 찾게 내버려두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퍼뜨려진 소문이 바로 함흥차사였을 거로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함흥차사는 권력이 어떻게 진실을 막고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적나라한 예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현대의 왜곡보도 속에서 진실의 실체에 다가서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공부거리가 될 것으로 믿는다.


'여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보와 보수의 본질 1부 – 2장. 동기화된 추론  (0) 2016.04.04
진보와 보수의 본질 1부 1장 – 기초 정보들  (1) 2016.04.04
한자의 역사  (0) 2016.01.17
1973.10.26  (0) 2016.01.17
민비 시해  (0) 2016.01.17
Posted by TwoTen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