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25건

  1. 2016.02.17 "학계 수수께끼 '노는 개미'는 집단의 장기존속 수단" by TwoTen
  2. 2016.02.15 중국군 핵심부가 분석한 '달러의 위안화 공격' by TwoTen
  3. 2016.01.17 함흥차사 by TwoTen
  4. 2016.01.17 한자의 역사 by TwoTen
  5. 2016.01.17 1973.10.26 by TwoTen
  6. 2016.01.17 민비 시해 by TwoTen
  7. 2016.01.16 광개토왕비 by TwoTen
  8. 2016.01.16 국호 韓'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by TwoTen
  9. 2016.01.11 접촉으로 성별이 바뀌는 생물 by TwoTen
  10. 2016.01.11 인간의 가장 편안한 각도 127도 by TwoTen
http://m.media.daum.net/m/media/digital/newsview/20160217110120154

"학계 수수께끼 '노는 개미'는 집단의 장기존속 수단"
日연구팀 "일하는 개미 지치면 일 시작..일하는 개미만 있으면 집단멸망 빨라져"

日연구팀 "일하는 개미 지치면 일 시작…일하는 개미만 있으면 집단멸망 빨라져"

개미집단에서 일하지 않고 노는 개미가 항상 일정 비율을 유지하는 것은 집단을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하는 개미들이 지쳐 일할 수 없게 됐을 때 놀던 개미들이 대신 일을 해 집단존속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미가 일하는 집단은 개미들이 지쳐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멸망위험에 빠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17일 요미우리(讀賣), 마이니치(每日)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홋카이도(北海道)대학 하세가와 에이스케(長谷川英祐) 교수(진화생물학) 연구팀의 이런 연구결과가 16일자 영국 과학지 사이언티픽 리포츠(Scientific Reports)에 실렸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개미집단에는 항상 20~30%의 일하지 않는 개미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하는 개미만을 모아 집단을 구성해도 일정 비율은 일하지 않고 쉰다. 반대로 일하지 않는 개미만을 모아 집단을 구성하면 20-30%를 제외한 나머지 개민들이 일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확인돼 있으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연계에서는 일하는 개미가 동시에 일할 수 없게 되면 알을 돌볼 수 없게 돼 해당 집단이 멸망한다.

연구팀은 일본 전국에 서식하는 뿔개미속의 한 종류(시와쿠시개미)를 사육, 한마리마다 구분할 수 있도록 색을 입힌 후 한 달 이상에 걸쳐 8개 집단, 1천200마리의 행동을 관찰했다. 관찰 결과 처음에 일하던 개미가 쉬게 되자 일하지 않고 놀던 개미가 일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한 집단 75마리의 개미 모두가 일하다 일제히 피로가 쌓이는 경우와 일하는 강도가 서로 다른 집단의 경우를 비교했다. 전체가 모두 열심히 일하는 개미로 구성된 집단은 구성원 모두가 일제히 피로해져 움직일 수 없게돼 집단의 멸망이 빨라지는 데 비해 일하지 않는 개미가 있는 집단은 오래 존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는 개미가 피로해졌을 때 놀던 개미가 대신 일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교수는 "일하지 않는 개미가 항상 있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집단의 존속에 꼭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인간의 조직에서도 단기적인 효율이나 성과를 요구하면 악영향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면서 "조직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라고 말했다.

아사미 다카히로(淺見崇比呂) 신슈(信州)대 교수(진화생물학)도 "쉬는 개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가치있는 연구 성과"라면서 "사람도 쉬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알려준 연구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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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의 광기는 美 지배전략의 산물"
[아시아 생각]"서구 이익의 폭력적 관철, 중동뿐 아냐"











"네오콘의 폭주, 美 국민은 막을 수 없다"
[주간 프레시안 뷰] 미국 경제 실체 드러나면 네오콘도 몰락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착취했나"
[주간 프레시안 뷰] 中 군사전략가의 美 금융제국 비판 <上>



달러 패권의 몰락, 인류 공존은 가능한가?
[주간 프레시안 뷰] 中 군사전략가의 美 금융제국 비판 <下>







중국군 핵심부가 분석한 '달러의 위안화 공격'
중국 차오량(喬良) 장군 … 달러 ‘10년 약세-6년 강세’ 순환 주기 밝혀

월가와 중국의 전쟁이 한창이다. 조지 소로스 등 헤지펀드 연합군이 중국의 관문 홍콩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이번 전쟁 결과는 달러 패권주의의 향방을 가른다는 점에서 전세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번 사태를 중국은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하고 있는지도 관심사이다. 이와 관련 중국 국립 국방대학의 교육주임인 차오량(喬良) 장군의 분석과 전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오량 장군은 미국이 1971년 이후 ‘10년의 달러 약세, 6년의 달러 강세’라는 달러 가치의 순환을 통해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금융제국이 됐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중남미의 외채위기,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바로 이러한 미국의 달러 조작에 의한 것이었으며 2012년에는 댜오위다오(센가쿠) 등 중국 주변에서의 지역적 위기를 통해 중국에 몰려든 막대한 국제 자본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려다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지금도 중국 주변의 지역 위기 조장을 통한 중국 내 국제자본의 미국 환류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령 시절인 1999년 왕시앙수이 대령과 공저로 펴낸 ‘무제한 전쟁(Unrestricted War)’이라는 저서에서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값비싼 첨단무기의 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의 전략을 혼란시키며,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의외의 장소에서 적을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한 강연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위협은 군사적이거나 지정학적인 것이 아니라 금융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달러 패권으로부터 중국의 안정적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중국 군의 사활적 과제라는 것이다. 중국 주변에서의 위기 발생이 대규모 군사 갈등으로 번져 국제 자본이 중국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중국 주변의 정세 안정이 가장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중국 국립 국방대학의 교육주임인 차오량(喬良) 장군의 강연 전문이다.

 

1. 중국의 주변 환경과 미국의 달러 패권

 

1) 역사상 최초의 금융제국 탄생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금융전문가 등 경제 문제에 정통한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전략적 관점에서 말하고자 한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은 달러와 금의 연동(peg)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44년 7월,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세계 패권과 기축통화의 지위를 물려받기 위해 3개의 국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정치시스템으로는 유엔, 무역시스템으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나중에 WTO가 됨), 그리고 금융 및 재정 시스템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그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국제통화체계에서 달러의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으로부터 27년이 지나는 동안, 즉 1971년에 이르러 미국의 통화 지배력은 금과의 연동 때문에 그 힘을 상실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시작될 당시, 미국은 달러의 지배력을 보증하기 위해 세계와 약속을 했다. 다른 나라의 통화들을 달러에 연동시킨다면 미국은 달러를 금에 연동시켜 그 화폐 가치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연동시킨다는 말인가? 금 1온스 당 35달러로 달러 가치를 고정시키며, (각국의 중앙은행에 대해) 35달러를 금 1온스와 교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와의 약속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달러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제멋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은 '35달러와 금 1온스의 교환' 약속을 지켜야 했고, 달러를 많이 찍어내 금 가격이 35달러를 넘어가면 그만큼 더 많은 금을 비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에 대해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 당시) 세계 금 비축량의 80%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은 미국의 소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개입해 엄청난 재원을 낭비한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만 투입한 전쟁 비용이 자그마치 8000억 달러에 이른다. 전쟁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미국은 달러-금 태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미국의 약속대로라면 35달러로 금 1온스를 살 수 있어야 했으나 달러의 남발로 달러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금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1971년 8월 미국의 금 보유량은 8800톤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심각한 재정 및 금융위기에 빠졌고,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곤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일례로 (1960년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자국이 보유한 달러(22억~23억 달러) 모두를 금으로 바꿔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도록 중앙은행에 명령했다. 드골은 미국은 '달러 가치 안정' 약속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금 태환을 요구하자 다른 나라들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달러를 원치 않소, 금으로 바꿔주시오'라고 미국에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달러-금 태환 약속을 파기했다. 달러와 금의 연동이 끊어진 것이다. 이로써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탄이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앞으로의 국제금융 체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달러를 신뢰했다. 달러는 지난 30년 가까이 국제 결제 및 기축통화로서 이용돼 왔기 때문이었다. 달러의 가치가 (미국 정부의) 보유 금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달러는 한낱 푸른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금으로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달러를 계속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달러를 국제통화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달러 대신 국가 간에 교역되는 재화의 가치 결정과 결제 역할을 할 마땅한 다른 국제통화가 없다는 문제다. 화폐란 가치 측정의 수단인데, 만일 달러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다른 나라의 통화를 신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중국과 러시아가 무역을 할 때 양국이 상대방의 통화인 루블, 또는 위안화를 결제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두 나라는 달러를 결제수단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달러는 30년 가까이 이어져온 국제 관행에 따라 국제통화로 쓰이게 됐다. 나아가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미국은 석유 수출 국가(OPEC)들에 대해 향후 모든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전까지 국제 석유 거래에는 여러 통화가 사용되었지만 1973년 10월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OPEC은 국제 석유 거래의 결제에는 오직 달러만을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미국은 달러와 금의 연동을 폐기한 후에 달러를 가장 핵심적 자원인 석유에 연동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달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석유라는 에너지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라는 점을 미국은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든 에너지가 필요하고, 모든 국가가 석유를 필요로 한다. 즉 (달러와 석유가 연동됨으로써) 누구나 석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모두가 달러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 된 것이다. 달러를 석유 거래 결제에 연동시킨 것은 미국의 매우 영리한 책략이었다. 1971년 달러와 금의 연동이 폐기되고 1973년 달러가 석유 거래에 연동됨으로써 미국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1971년 달러-금의 연동 폐기

 

많은 경제학자, 금융전문가들은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 또는 소련의 붕괴가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와 금의 연동 폐기다. 그 이후 인류는 금융제국의 탄생을 지켜보았으며 이 금융제국은 자신의 금융시스템 안에 모든 인류를 가둬놓고 있다. 이른바 달러 패권은 바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이 금융시스템은 40년을 넘기고 있다. 1971년 이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종이 화폐의 시대에 살고 있다. 국제 화폐인 달러가 금 등 귀금속의 보장 없이 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오로지 미국 정부의 신뢰도, 그리고 이 체제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국가와 개인들의 지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미국은 푸른색 종이(지폐)를 찍어냄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물질적 부를 획득하게 됐다. 이런 상황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윤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외환 거래, 금과 은의 거래, 또는 전쟁을 통한 약탈 등이 있다. 그러나 전쟁 비용은 여전히 엄청나다. 그러나 그저 지폐에 불과한(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로 사용되는) 달러가 등장함으로써 미국은 아주 수지맞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달러와 금의 연동이 파기됨으로써 미국은 마음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 마구 찍어낸 달러가 미국 내에 머물러 있다면 심각한 인플레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반면 달러가 해외로 유출된다면 세계 전체가 미국이 짊어져야 할 인플레의 짐을 나눠 갖는 셈이 된다. 미국의 인플레가 그다지 높지 않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미국 달러의 해외 유출이 국내 인플레를 희석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미국 정부가 (필요 자금 충당을 위해) 달러를 계속 찍어낸다면 달러 가치는 하락할 것이며 이는 미국에 좋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준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러를 찍어내지는 않는다. 사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달러 발행에 관한) 여러 제한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창립 이후 지난 100년간(1913~2013) 연준은 모두 10조 달러를 발행했다.

 

이와 비교하여 일부 사람들은 중국 중앙은행을 (통화 발행량이 너무 많다고) 비난한다. 왜 그런가? 중국 중앙은행은 1954년 신화폐(런민비: 人民幣)를 발행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120조 위엔을 발행했다. 미 달러와의 환율 6.2를 적용하면 약 20조 달러가 된다. 이처럼 발행 액수가 많다고 해서 중국이 미친 듯이 화폐를 남발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말)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은 엄청난 액수의 달러를 벌어들였고 또한 많은 금액의 달러가 직접 투자의 형태로 중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외환 통제를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달러가 원래 형태로 중국에서 유통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달러나 다른 외환을 보유하는 대신 그 가치에 상응하는 런민비를 발행한다. 물론 외국인 직접투자는 그들이 중국에서 돈을 번 후 자유롭게 국외로 반출할 수 있다. 또한 중국으로서는 외국에서 자원, 에너지, 상품, 기술들을 수입하기 위해 외환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상당액의 달러는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런민비는 중국 국내에 남는다. 국내에 유입되는 외환 액수에 해당되는 런민비를 그냥 없애버릴 수는 없다. 중국 내에서 유통되도록 남겨놓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런민비의 규모가 달러보다 커지게 된 것이다. 사실 이는 지난 30년간 중국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 중앙은행은 최근 수년간 아마도 20조 위엔 이상을 발행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대부분은 중국 내에 머물러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런민비의 국제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2) 달러 가치의 순환과 세계경제와의 관계

 

미국이 인플레를 겪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달러를 전 세계적으로 유통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도 달러를 무한정 발행할 수 없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러 발행을 조절해야 한다. 달러 발행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달러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는 뜻인데 그 경우 미국은 어떻게 달러를 확보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은 나름대로의 해법을 갖고 있다.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해 외국에 나가 있는 달러를 미국으로 다시 끌어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의 달러가 부채 형태로 미국으로 되돌아올 때, 미국은 새로운 수법을 동원한다. 한쪽에서는 달러를 찍어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달러를 빌리는 것이다. 돈을 찍어내도 돈을 벌고 돈을 빌려도 돈을 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제조업 등) 실물경제보다 금융을 통해 훨씬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고된 땀을 흘려가며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업이나 가공업을 하려 하겠는가? 1971년 8월 15일 이후 미국은 점차 실물경제를 포기하고 가상경제(virtual economy)로 옮겨갔다. 오늘날 미국 GDP는 연간 18조 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실물경제 몫은 5조 달러가(27.7%) 채 안 되며 나머지는 가상경제에서 창출된 것이다. 미국은 채권 발행을 통해 해외의 달러를 미국으로, 더 정확하게는 다음 3개의 자금시장으로 불러온다. 선물시장, 채권시장, 주식시장이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미국 달러는 달러를 버는 황금알이 된다. 미국과 해외를 순환하면서 이윤을 남기며 이를 통해 미국은 금융제국이 된 것이다. 미국은 세계 금융시스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영 제국의 몰락 이후 식민지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이 금융제국이 된 이후 달러를 은폐된 '식민지적' 팽창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달러를 통해 각국 경제를 통제하며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자신의 금융 '식민지'로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에는 중국을 비롯해 주권을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있다. 이들 국가들은 주권과 함께 독자적 헌법과 정부를 가지고 있지만 달러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 나라의 부는 달러로 표시되며, 이렇게 달러로 표시된 물질적 부가 외환 거래를 통해 미국을 드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미국 달러의 금융 식민지

 

지난 40여 년간 달러 가치의 변동을 통해 이러한 실상을 명확히 볼 수 있다. 1971년 8월 15일 달러-금 연동이 폐기됨으로써 금의 족쇄에서 벗어난 미국은 마음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달러 유통량은 늘어났고 자연히 달러 가치는 떨어졌다. 1971년 이후 특히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 달러 가치는 떨어졌다. 이는 미국이 달러를 많이 발행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10년 가까이 지속됐다. 달러 가치의 하락이 세계 경제에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달러의 공급이 늘어났고 이는 유동자본의 증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유동자본의 대부분은 미국 내에 머물지 않고 대부분 외국으로 나갔다. (1970년대에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대규모 자본이 라틴아메리카로 갔다. 이에 따라 중남미는 투자가 늘어났고 번영을 누렸다.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붐은 이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다.

 

달러 홍수의 시대는 약 10년간 지속됐다. 1979년 미국은 달러의 수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달러 가치가 낮다는 것은 미국이 달러 저수지의 수문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수문을 닫는다는 것은 달러 유동성이 감소되는 것을 뜻한다. 1979년 달러 가치가 상승했고 외국으로의 달러 유출도 줄어들었다. 라틴아메리카는 많은 금액의 달러를 받아들여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달러 수문이 닫히면서 갑자기 투자가 줄어들었고, 유동성이 고갈됐으며, 경제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곤경이 시작되자 각 나라들은 탈출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보자. 당시 아르헨티나는 1인당 국민소득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있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아르헨티나는 가장 먼저 침체에 빠졌다. 경기 침체의 해결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였고 갈티에리 대통령은 경제에는 문외한이었다. 군인인 갈티에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해법은 오직 하나, 전쟁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했다. 그래서 본토에서 600km 떨어진 말비나스제도(영국명 포클랜드 제도)를 영국으로부터 탈환하려 했다. 갈티에리는 지난 100년간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해온 말비나스가 아르헨티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남미의 국가다. 따라서 미국의 뒷마당에서 전쟁을 하려면 우선 미국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갈티에리의 측근은 이 문제에 대한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의중을 떠보았다. 레이건은 말비나스를 탈환하려는 갈티에리의 계획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양자 간 문제이며 미국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 우리는 중립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갈티에리는 이를 미국의 묵인으로 받아들였고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켜(1982년 4월 2일) 손쉽게 포클랜드를 되찾았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국민들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대처 당시 영국 총리가 반발했다. 대처는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레이건에 대해서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레이건은 중립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아르헨티나의 행동은 침략에 해당된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영국 편을 든 것이다. 이후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항공포함을 파견해 포클랜드제도를 회복했다.

 

그동안 달러 가치는 상승하기 시작했고, 국제 자본은 미국의 소망대로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자 국제 투자자들은 즉각 결론을 내렸다. 라틴아메리카에 지역적 위기가 발생했고 따라서 이 지역의 투자 환경이 악화되고 있다고. 하나 둘, 투자자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투자금을 회수해 갔다. 그 순간 미 연준은 미국 금리의 인상을 발표했다. 미국 금리의 인상이 발표되자 라틴아메리카에서 회수된 투자금이 갈 곳은 뻔해졌다. 미국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는 폐허가 됐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철수한 자본은 거의 모두가 미국의 3대 자본시장(채권, 선물, 주식)으로 향했고 미국은 (1971년) 달러-금 연동 폐기 이후 최초의 호황을 맞았다. 달러 환율은 60포인트, 그 다음에는 한번에 120포인트가 올라 100% 이상 상승했다. 미국의 3대 자본시장은 돌아온 달러를 그냥 갖고만 있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로 몰려가 경제위기로 헐값이 돼버린 고급 자산들을 대거 사들였다. 이렇게 해서 라틴아메리카 경제를 다시 한 번 약탈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달러 강세가 일으킨 상황이다.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났다면 우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종의 의도된 결과, 정형화된 사례임에 분명하다. 첫 번째 달러 가치의 순환 사이클-10년의 달러 약세와 6년의 달러 강세-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금융위기의 절정기 이후 1986년부터 달러 가치는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금융위기(1990년)와 유럽의 통화위기(1992년)가 있었지만 달러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약 10년이 지난 후인 1997년 달러가 다시 강세로 돌아섰다. 이번에도 달러 강세는 6년간 지속됐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달러 가치의 하락과 상승이 동일한 패턴을 보인 것이다. 10년의 약세, 6년의 강세, 그리고 다시 10년의 약세, 6년의 강세.

 

지역 위기 조장, 달러의 미국 환류, 금융 이익 획득

 

1986년 이후 달러는 두 번째로 약세로 돌아섰다. 이후 10년 동안 달러는 홍수처럼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번에 달러의 홍수가 밀려간 곳은 아시아였다. 1980년대에 가장 유행했던 말이 무엇인가? "아시아의 4마리 용" "아시아의 기러기 대열(일본 경제의 선도 하에 동아시아 경제가 발전했다는 뜻)" 등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시아의 번영이 부지런하고 똑똑한 노동자, 그리고 탁월한 사업가적 기질 덕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대대적 투자가 가능할 만큼 충분한 달러가 아시아 국가들에 유입됐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경제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미국은 이제 그 과실을 수확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1997년까지 만 10년 동안 달러 가치는 약세에 머물러 있었다. 바로 이때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달러 공급을 줄임으로써 달러 약세를 강세로 전환시켰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 기업들, 그리고 산업들은 심각한 유동성 부족을 겪었고, 일부는 파산했으며 아시아에 경제 및 금융 위기의 징후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주전자 속의 물은 9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 1도만 더 올리면 물은 끓을 터였다. 그 1도를 위해서 (포클랜드전쟁과 같은) 지역적 위기가 필요했다. 반드시 전쟁일 필요는 없었다, 전쟁이 지역적 위기를 촉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목표는 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을 철수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전쟁 없이도 지역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소로스와 같은 금융투기꾼, 그가 운영하는 퀀텀 펀드, 전 세계의 수 백 개 헤지 펀드들이 마치 굶주린 늑대 떼처럼 아시아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태국의 바트화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트 위기가 시작된지 약 1주일 만에 위기의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남쪽으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덮치더니 다음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국, 타이완, 홍콩, 일본, 한국, 그리고 러시아까지 위기가 퍼져나갔다. 동아시아 금융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물은 끓기 시작했다. 국제 투자자들은 아시아의 투자 환경이 악화됐다고 결론 내리고 아시아로부터 자본을 빼내갔다. 기회를 잡은 미 연준은 금리 인상의 나팔을 불었다. 아시아에서 철수한 국제 자본은 다시 미국의 3대 자금시장으로 물려들었고 미국 경제는 두 번째 대호황을 누리게 됐다. 충분한 자금을 끌어 모은 미국은, 이전에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로 돌아와 헐값이 돼버린 고급 자산들을 대거 사들였다. 이것으로 아시아 경제는 재기의 힘을 잃어버린 채 완전히 무너졌다. 오로지 중국만이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던 탓이다.

 

3) 다음은 중국 차례

 

이후 6년간의 강세 끝에 2002년부터 달러는 약세로 돌아섰다. 이전의 패턴을 정확히 반복한 것이다. 미국은 10년이 지난 2012년부터 달러 강세로의 전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한 것이었다. 지역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2010년의 천안함 침몰, 이후 댜오위다오(센가쿠열도)와 황유안(스카보로) 등 중국 인근 해역에서의 중국-일본, 중국-필리핀 간의 영토분쟁이 그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이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아주 재수 없게도 2008년 국내에서의 불장난으로(주택담보 불량 금융대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달러 강세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필리핀, 중국-일본 간의 영토 분쟁이 달러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도대체 3번째 달러 약세가 끝나가는 시점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야말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사안이다.

 

만일 우리가 1971년 달러-금의 연동 폐기 이후 달러 가치의 변화에 일정한 순환 패턴이 있었고, 미국이 이 패턴을 이용해 다른 나라의 경제를 파괴하면서 막대한 금융 이윤을 얻어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차례는 중국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 그런가? 중국은 매력적인 국제 투자처로 중국 경제에 낙관적 전망을 가진 국제 투자자들이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법칙의 관점에 보자면, 중국은 국가 규모의 경제를 넘어선다. 현재 중국의 경제 규모는 라틴아메리카 경제 전체보다도 크며 동아시아 경제의 절반에 해당된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엄청난 자금이 중국에 몰려들어 중국 경제는 눈부신 속도로 성장하면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이런 사실들을 놓고 볼 때, 미국이 중국을 3번째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상과 같은 평가가 정확한 것이라고 한다면, 2012년 이후 중-일 간의 댜오위다오 영토분쟁, 중국-필리핀 간의 황유안 영토분쟁, 그리고 지난해 '981 광구'를 둘러싼 중국-베트남 영토 분쟁과 이후 홍콩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에 이르기까지 중국 인근 지역에서 분쟁과 소요가 잇따라 발생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과연 순전히 우연일까? 지난해 5월 나는 국립국방대학의 정치주임인 류야조우 장군을 모시고 홍콩을 연구차 방문한 바 있다. 당시 이미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은 달아오르고 있었고 5월말에는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5월말, 시위는 시작되지 않았다. 6월말, 7월말, 8월말에도 시작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달아오르고 있었던 민주화 시위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다른 사안과의 일정표를 비교해보자. 미 연준의 양적 완화(QE) 종료 시점이 그것이다. 지난해 초, 미국은 양적 완화 종료를 예고했다. 그러나 4월, 5월, 6월, 7월, 8월이 지나도록 미국은 양적 완화 종료를 선언하지 않았다. 미국이 양적 완화를 종료하지 않았다는 것은 달러를 더 많이 발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는 달러가 강세로 돌아설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홍콩의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은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댜오위다오, 황유안, 981 광구, 그리고 홍콩 민주화시위 등 4개 사안은 하나 하나가 폭발적 사안들이다. 이중 하나라도 위기로 발전한다면 동아시아의 지역 위기를 초래했을 것이고, 중국을 둘러싼 지역의 투자 환경은 악화된다. 그렇게 된다면 달러 패권에 의한 금융 수입 모델의 기본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켰을 것이다.

 

"달러 가치가 상승했을 때, 다른 지역에서는 위기가 발생한다. 위기 발생으로 투자 환경이 악화되면 그 지역의 대규모 투자가 그곳을 떠나 미국으로 몰려든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는 불운하게도 이번에는 중국을 상대로 해야 했다. 중국인들은 태극권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즉 주변 지역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결과는 미국이 원했던 상황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물의 온도를 99도까지는 올렸지만 마지막 1도를 올리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물은 아직 끓어오르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물이 끓지 않는다면 미 연준은 금리를 인상할 수 없다. 아마도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금융 이윤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미국은 홍콩의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을 은밀히 지원하는 한편 다른 지역에서 위기를 조장하는 공작을 시작했다. 어느 곳인가? 우크라이나다.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만나는 곳, 우크라이나다.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통치했던 우크라이나는 그 자체로는 썩 좋은 먹잇감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국에 순종하지 않는 야누코비치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를 빌미로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관계 강화를 막을 수 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유럽의 투자 환경이 나빠질 터였다(그리하여 유럽을 떠난 자본은 미국으로 올 터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은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크라이나에서는 외견상 시민들의 자발적 '색깔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미국은 자신은 물론 지구 상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성과를 얻어냈다.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빌미로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합병해 버린 것이다. 푸틴의 크림 합병은 미국의 당초 계획에 없었던 것이지만 미국은 이 기회를 낚아챘다. 유럽연합은 물론 일본에 압력을 가해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하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유럽 경제도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됐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1조 달러 유럽에서 이탈

 

미국은 왜 이런 일들을 해야만 했을까? 대체로 사람들은 (국제 문제를) 자본의 관점보다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의 대유럽, 대미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는 유럽의 투자 환경을 악화시켜 대규모 자본 이탈을 초래했다. 통계에 따르면 1조 달러 이상이 유럽을 떠났다고 한다. 미국의 양면 전략(동아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지역 위기 조장)이 성공한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 머물고 있는 국제 자본을 미국으로 끌어올 수는 없었지만 유럽의 국제 자본을 끌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극적인 상황 변화로 유럽의 국제 자본을 이탈시키는 데까지, 즉 1단계는 성공했지만 2단계는 미국의 소망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통계에 따르면, 유럽을 탈출한 국제 자본이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대부분 홍콩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 투자자들이 아직 미국의 경기 회복 전망을 낙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최근 들어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긴 하지만 중국 경제에 더 큰 희망을 걸고 있다는 얘기다.

 

이상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지다. 두 번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상하이와 홍콩 주식시장의 연계 계획을 발표했다. 두 주식시장의 연계를 통해 국제 투자자들의 중국 투자를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과거 서방 자본은 감히 중국 주식시장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의 강력한 외환 통제로 자금 회수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국제 자본이 중국에 들어오는 것은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제 투자자들은 중국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를 꺼렸다. 그러나 상하이와 홍콩의 주식시장이 연계됨으로써 홍콩을 통해 상하이 주식시장에 투자해 돈을 번 다음에는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됐다.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이 시작된 지난 해 9월 이후 홍콩에 몰려든 국제 자본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 때문에 앞으로도 '오큐파이 센트랄' 운동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한 지역 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홍콩에 몰려 있는 국제 자본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 이윤으로 먹고 사는 미국

 

미국 경제가 국제 자본의 흐름에 그토록 크게 의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971년 8월 15일 달러-금의 연동 폐기 이후 미국 경제가 실물 생산, 그리고 실물 경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저부가가치의 제조업 등 실물경제를 쓰레기산업, 또는 사양산업이라고 부르며 이들 제조업 등을 개발도상국, 특히 중국으로 이전시켜 왔다. 나아가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이른바 첨단산업 부문을 빼놓고는 일자리의 70%를 금융 및 금융서비스 부문으로 옮겼다. 이제 미국은 제조업 등 산업 부문이 공동화됐으며 국제 투자자들에게 큰 이윤을 보장해줄 수 있는 실물경제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미국은 경제의 다른 출구를 찾아야 했다. 바로 가상경제다. 가상경제는 3개의 시장을(선물, 채권, 주식) 갖고 있다. 국제 금융 자본이 이 3개의 시장에 머물러 있는 한 미국은 이윤을 창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창출된 막대한 이윤으로 세계를 상대로 바가지 씌우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또는 이를 '미국적 생활방식'이라 부를 수 있겠다. 미국인의 일상적 생존과 미국 경제의 유지를 위해 미국은 대규모 자본의 미국 회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본의 미국 회귀를 막는 모든 것들은 미국의 적이다. 우리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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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여러이야기 2016. 1. 17. 00:18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923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죽었을까?

함흥차사의 비밀
연재일 : 2016.01.11 by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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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일이다.

오랫동안 글을 떠나 있던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찾은 곳은 오대산 기슭이었다. 처음에는 아예 월정사든 상원사든 절에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오대산을 찾아갔지만 막상 절에 당도해 이모저모를 생각하는 사이 내 마음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절에 잘못 들어갔다가 글이 잘 안 된다면 그때는 감옥생활과 다름없을 것 같았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가끔 술도 마셔야 하고 때로는 고기도 먹어야 하고 어쩌다 편안한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얘기도 주고받아야 하는데, 요사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 종일 절체절명의 고독만을 마주 대하고 있어야 한다면 글은커녕, 내 자신이 폭발해버릴까 봐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모양은 좀 그랬지만 나는 결국 민박집에 둥지를 틀기로 결심하고 그중 좀 외떨어지고 분위기도 조용해 보이는 민박집 하나를 골라 아예 석 달 치 방값을 선불로 지불해버렸다. 별로 손님이 없던 시즌에 석 달 치 방값을 한꺼번에 내놓자 주인은 나를 칙사처럼 대접했다. 나는 주인의 배려로 그 집 아들이 쓰던 책상을 하나 얻어 그 위에 노트북을 놓고 앉았다. 

그 무렵은 IMF가 닥쳐 사람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때라 나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한편, 곧 닥칠 증권시장 개방에 따른 국제 핫머니의 위험을 알리고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을 쓰려 했다.

그러나 그런 경제소설은 대중이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어떤 방법으로 소설을 쉽게 풀어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월정사 부근의 산길을 산책하며 다양한 플롯을 생각했다가 허물어버리길 수없이 했는데,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제소설을 쓴다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진리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보려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쓴 책이라면 그게 어떤 분야를 다루는 것이든 모두 다 읽어보자는 집념으로 몇 년간 미친 듯이 책을 읽었던 적도 있었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오직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끝없이 나 자신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자연과의 교감 상태를 넘어 주화입마 직전까지 가기도 했는데, 나는 선지식이 없는 정신 공부는 위험하다는 생각 끝에 그런 쪽을 접은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산사 주변에서 사람을 피한 채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어느새 내게는 젊은 시절의 그 신기(神氣)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나는 어느 때는 민박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에서 밤을 새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다 보니 현재의 어려운 나라사정을 걱정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를 관통해온 나라의 운명 같은 걸 더듬어보게 되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리에는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 끝이 안 좋았다는 생각이 스쳐 갔고, 그러다 보니 나라의 힘이 모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조선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든 대통령이든 끝까지 잘된 지도자를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보던 나는 왕권이나 정권을 둘러싼 나쁜 전통이 우리 역사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나는 부인을 흉탄에 잃고 자신 역시 변사한 박정희 대통령부터 시작해 일인들에게 불태워진 명성황후, 뒤주 속에서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삼촌에게 죽은 어린 단종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시작했는데, 유독 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나의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태조 이성계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기를 뻗칠 리가 없는지라 그 이상한 기운이 무엇인지 의아해하며 석연치 않은 의구심을 품은 채 영혼을 달래는 기도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는 밤이 깊도록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물론 빈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때 불현듯 뇌리를 스쳐가는 한마디가 있었다. 

"함흥차사."

나는 비로소 그 순간
태조 이성계의 한(恨)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분노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정종에 이어 왕이 된 태종(이방원)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들을 보냈지만,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여서, 한번 함흥에 차사로 가면 감감무소식이 된다는 데서 생겨난 고사였다.




보물 제931호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나는 그 고사 속의 비밀을 훔쳐본 셈이었다.

나는 종교나 무속에서 얘기하는 영혼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이 있고 억울한 사연도 있는 법이다. 상대에게 영혼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억울함이나 한을 풀어주는 것은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로부터 다시 하루 온종일을 함흥차사에 얽힌 비의를 생각하다가, 짐을 꾸려 돌아와서는 <조선왕조실록>을 확인했다. 비록 왕조실록은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대로 이성계는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최후는 함흥차사라는 이야기로 500년 이상 덮여왔고, 따라서 그의 한은 너무나 오랫동안 풀어지지 못한 채인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마침내 그로부터
구성의 영감을 얻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IMF 위기로 도탄에 빠진 사회를 위해 뭔가 힘이 되는 소설을 쓰고자 했던 나는 그에 더해 태조 이성계의 한을 풀어주는 것을 접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하늘이여 땅이여>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함흥차사의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함흥차사란 무엇인가요?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죽인다는 것인데, 그 궁극적인 뜻은 결국 함흥에 가면 죽는다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과연 누가 죽일까요? 이태조가 죽일까요?"

"명궁인 이태조가 활을 쏘아 죽인다는 것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아들한테 붙잡혀 함흥에 유폐당한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활을 쏘아 죽인다구요? 사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친구와 부하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오히려 사람이 그리웠을 이태조가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어야 할 사람들을 죽인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정확한 뜻은 이방원이 보내는 사신만을 죽인다는 것 아니오?"

"왕이 자신의 부친이자 태상왕인 이태조에게 보내는 사신이라면 미관말직의 관리였을 리 없습니다. 조정의 원로이거나 적어도 당상관의 벼슬은 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실록에 혹은 어느 역사 기록에 이태조에게 사신으로 가서 죽었다는 관리들의 이름이 있던가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태조에게 보내는 사신 중에는 이성계의 친구이거나 부하이거나 따르던 사람도 많았겠지요. 그들을 모두 죽였을까요? 아니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사신의 목적으로 왔다고 하면 가는 길에 활을 쏘았을까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예요. 함흥차사는 말로만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신은 없는 것이 그 증거죠."

"그렇다면 어째서 함흥차사란 얘기가 생겨났다는 거요?"

"사람들이 함흥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즉, 이태조를 찾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란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흥에 가는 사람은?"

"죽는 거지요."

"이태조가 아닌 이방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요?"

"바로 그렇지요. 그게 함흥차사에 숨어 있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태조를 음해했다는 것인데, 조선 500년간, 아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그 함흥차사란 말에 의해 속아왔다는 말이오?"

"그렇지요. 이방원의 쿠데타 이후 태조는 죽는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을 겁니다."

_<하늘이여 땅이여> 중에서

누군가는 이 가설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아니 처음으로 이러한 주장을 펼쳤던 1998년 초까지만 해도 저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후부터 당대를 다루는 여러 역사드라마에서 저러한 나의 주장에 맞게 태조와 태종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태조실록>은 이방원의 심복 하륜이 이미 손을 댄 데다가 세종 8년에 그 쿠데타 부분을 다시 한 번 고쳐 썼기에 당시의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든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던가.

현대사에도 유사한 예가 있다.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을 백담사에 유배시켰다. 사람들은 누구도 백담사에 유폐된 전두환을 쉽게 찾아가지 못했다. 권력에 의한 유폐란 필연적으로 방문금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늘상 다닌다면
그건 더 이상 유폐가
아닌 것이다

함흥차사란 말을 보면 유폐의 냄새가 짙게 난다.

그 비의는 이성계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폐의 전형인 셈이다. 당시의 유교 사회는 충과 효가 으뜸의 가치인데, 이방원은 자신이 아버지를 함흥에 유폐시킨 채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를 찾게 내버려두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퍼뜨려진 소문이 바로 함흥차사였을 거로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함흥차사는 권력이 어떻게 진실을 막고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적나라한 예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현대의 왜곡보도 속에서 진실의 실체에 다가서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공부거리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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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역사

여러이야기 2016. 1. 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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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연재일 : 2015.12.28 by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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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발굴단이 현지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랫동안 숱한 수수께끼를 뿌려왔던 산둥 안양현에 위치한 은허의 발굴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발굴단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베이징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유수의 대학에서 선발된 고고학 및 인류학, 역사학 교수들과 연대측정 전문가들, 서지학자들, 심지어는 인골 감정 전문가들까지 망라된 대규모 발굴단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뉴스를 연일 숨 가쁘게 토해냈다. 모든 뉴스 중 압권은 단연코 하루가 다르게 3천 년 이상 덮어쓰고 있던 흙을 털어내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고대의 글자였다.

갑골문

거북이 등껍질과 소 어깨뼈에 쓰인 수많은 글자에 발굴단은 아연 경악했고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그중에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하늘 천(天), 사람 인(人), 임금 왕(王) 같은 글자도 있었고 동녘 동(東)이나 가을 추(秋)와 같이 좀 복잡한 글자도 있었지만, 출토된 글자는 분명 한자였고 그중 수백 자는 누구나 첫눈에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발견된 갑골문.
은(殷)

중국의 고대 문헌상에서만 존재하던 나라 은은 분명 실재했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한자는 이미 5,000자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위대한 황하 문명의 실체에 모든 중국인들이 들떠 환호하고 있을 무렵, 정작 은허의 발굴지에서는 한 무리의 전문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출토된 수백 수천 개의 해골 더미 옆에서 고심하고 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인골전문가들이었다.   

"동이(東夷)!"

해골로 본 은허의 주인공들, 즉 은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천만뜻밖에도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재직 시절 대만에서 중국의 문호 임어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안 장관은 당시 한글전용이냐, 한자병용이냐로 시끄럽던 국내의 상황을 빗대 이와 같이 농담을 던졌다.

"임 선생, 당신네 중국인들이 한자를 만들어 우리까지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그러자 임어당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한자는 당신네 한국인들의 조상 동이족이 만든 건데 아직 그것도 모른단 말씀입니까?"

사실 임어당뿐만 아니라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개가 한자의 주인공을 한족이 아닌 동이족이라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 근거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허의 발굴, 즉 고고학에서 찾고 있다.

인골 외에도 은허에서 출토된 반월형 동검이라든지 회색 토기, 그리고 무엇보다 묘제, 즉 사람을 장사 지내는 방법은 은나라가 동이족의 문명이라는 걸 확고히 보여준다. 묘를 만드는 방식은 부족마다 고유한 데다 오랫동안 바뀌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묘제를 문명 구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고 있는데, 은이 존재했던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동이족의 석관묘와 한족의 목관묘가 대표적 장묘방식이었다.

그런데 은허에서 출토된 묘는 죄다 석관묘였으니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은나라를 동이족이 건국한 나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학계로서는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라 은허 발굴 이후 깊은 침묵과 고뇌가 이어졌지만 양심적 학자들이 자신의 소신에 따라 연속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해 동이족이 동북쪽에서 내려와 기원전 1,500년 무렵 은나라를 건국하여 약 5백 년간 살다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자신들의 고향인 동북쪽으로 되돌아갔다는 동이의 은나라 건국설은 지금 와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이족의 뿌리

사실 은의 주인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 이전에도 드물지 않게 기록에 의해 주장되고 있던 터였는데, 사마천 또한 그의 저작 <사기(史記)>에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족(華族)의 나라이다, 또한 동이는 대륙의 동쪽에, 화하는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하며 한족의 주나라가 먼 거리를 이동해 동이족의 은나라를 멸망시켰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인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동이족은 어떤 뿌리를 가진 사람들일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로 문명을 이룬 인류 중 일부가 조금 서쪽으로 이동해 이집트 문명을 이루었고 차츰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인더스, 갠지스 문명을 이루고 다시 조금 더 동쪽으로 이동해 황하 문명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4대문명론이다.

그러나 이 4대문명론은 최근에 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최근에 뚜렷이 드러난 '요하 문명' 때문이다.

중국 요양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요하 문명의 주인공은 황하 문명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의 이동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 직접 이동해왔고 그 시기도 황하 문명보다 빨랐다고 하는 것이 요하 문명의 요체이다.

즉 인류의 이동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진한 사람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 북으로 올라가 시베리아를 걸어 동진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바이칼 호수를 거쳐 북중국과 만주, 한반도, 일본 열도에 정착했고 일부는 베링을 지나 아메리카 인디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동이족은 거의 모두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고 우리 한국인들은 동이의 현존하는 후예로서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밝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동이족이 한자를 발명했음에도 지금에 와서 한자는 당연히 한족의 글자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동이족의 나라 은은 어째서 한족의 나라로 수천 년 동안 여겨져 왔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공자는 본래
은나라 유민의 후예

물론 심대한 역사왜곡이 있었고, 그 왜곡의 한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성인 공자(孔子)이다. 사실 일본의 식민사관보다 무서운 게 중국의 춘추사관인데 세상을 오로지 한족 중심으로만 보는 춘추사관을 확립한 사람이 바로 공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컬한 건 동이족의 은나라를 한족의 주나라와 같은 뿌리로 합쳐버린 이 공자가 본래는 은나라 유민의 후예라는 점이다.

공자가 은나라를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나라로 보고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절규와도 같은 그의 두 마디 고백을 생각해보면 은나라와 주나라 사이에서 그가 겪었던 정체성의 고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본래 은나라 사람이다(予始殷人也)."

공자가 말년에 한 말인데 그가 은나라와 주나라를 같은 종족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나오기 힘든 고백이다. 또한 그는 젊은 시절 주나라 수도 낙양을 가보고는 감동하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련다(吾從周)!"고 결심한다. 이 역시 은나라 유민으로서 핏줄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이냐의 고뇌를 담은 한마디 절규이다.

방황 끝에 마음을 정한 공자는 자기 이전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고대사를 자의적으로 편집해 <서경> <춘추> 등의 역사서를 남겼다. 그의 역사관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데 치중하기보다는 확고부동한 자신의 시각에 따라 사건을 배열하거나 만들어내기조차 한 걸로 보인다.

특히 왕조의 흥망과 관련해서 그의 심한 왜곡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중심사상인 충(忠)이 갖는 현실적 모순 때문이다.

백성은 군주에게 충성해야 하는데 만약 군주가 자질이 엉망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매우 고심했다. 자질이 되고 안 되고를 신하든 백성이든 군주에게 충성해야 할 사람들이 판단한다면 충이란 사상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오랜 고심 끝에 유학이라는 현실적 학문에 신(神), 즉 하늘을 접목시켰다.

신하와 백성은 군주의 자질이 엉망일 경우에도 충성해야 하며 정말로 형편없는 군주는 하늘이 천명을 내어 교체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망하는 나라의 임금은 반드시 엄청난 학정을 펴는 폭군이고 폭군을 축출하는 사람은 천명을 받은 성군이라는 패턴을 만들어 자신이 편찬한 사서에 펼쳤다.

이 패턴에 따라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천하절색의 요부 말희에 빠져 국정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이어야 했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 역시 악녀 달기에 미혹돼 주지육림의 학정을 편 자라야 했다. 하나라를 멸망시킨 탕과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성군으로 기록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대사의 왜곡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역사상 최고의 군자로 보고 주나라를 너무 좋아했던 공자에게 한족의 나라 주나라보다 이민족의 나라 은나라가 5백 년이나 앞서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문젯거리였다. 나라의 창건을 하늘의 뜻으로 본 공자는 국가의 권위와 정당성을 '오래된 것'에서 찾았는데 대륙에 최초로 만들어진 나라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은나라와 주나라를 같은 종족으로 합치는 길을 택해 동이족의 나라 은나라는 주나라와 혈통이 같은 나라, 즉 한족의 나라로 둔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편찬한 <서경>에 나오는 '화하만맥 망불솔비(華夏蠻貊 罔不率?,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니 한족 동이족 할 것 없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기록은, 비유하자면 '왜가 조선을 치니 왜인, 조선인 할 것 없이 모두 기뻐하며 따랐다'는 것과 똑같으니 왜곡의 정점을 찍었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을 무한 존경하면서도 스승의 역사기록은 믿지 않았으며 자공은 '은나라 주왕이 그리 폭군은 아니었던 듯하다'는 표현으로 스승을 거역했으며 심지어 맹자는 '<서경>을 믿느니 차라리 없음만 못하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공자의 왜곡을 비판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고대사의 왜곡과 관련하여 공자라든지 중국인들만을 원망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운명적으로 춘추사관에 의해 역사왜곡을 당하게만 되어 있는 절대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록한 우리 자체의 역사서를 모조리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후기인 고구려를 기록한 종이 한 장, 대나무 한 조각, 우피지나 양피지 한 편조차 이 땅에는 남아있는 게 없다. 이문진이 편집한 역사서 <신집>은 어디에 있으며 <유기> 백 권은 어느 땅에 묻혀 있단 말인가.

고구려가 이럴진대 그전의 역사는 어떻겠는가.

실상이 이러해 모든 기록을 한족중심사관으로 도배된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의 온전한 옛날 모습을 알아낸다는 건 지난하다. 하지만 모든 길이 꽉 막힌 것만은 아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진정한 문제점은 과거의 기록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이 사회의 역사의식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5백 년간 이웃 나라인 중국을 하늘로 보는 춘추사관, 이어진 일본의 지배와 식민사관, 그 후 군사독재를 겪으며 우리는 성숙한 문화적 내면적 의식을 크게 상실하고 현실적 가치에만 눈이 먼 채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있다.

"돈이 최고"라든지 "돈 없으면 죽는다"는 등으로 표피적 현실에만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와 역사는 눈앞의 물질보다 오히려 삶을 훨씬 값어치 있게 하고 자신감을 북돋운다. 또한 사물을 정확하고 본질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는 길들여진 의식을 벗어나 자각과 이성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지구인 모두가 신뢰하는 <과학>의 눈으로 은나라를 보고 은자를 볼 것이냐, 아니면 공자의 제자들조차 부정하는 <춘추>의 눈으로 주나라를 보고 한자를 볼 것이냐는 질문은 목마르게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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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0.26

여러이야기 2016. 1. 1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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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죽음,
배후는 누구인가?

한국현대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하루
연재일 : 2015.12.14 by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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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했다

당시는 내부적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등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던 때였다.

둘 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한미군 철수는 당시 남북의 군사력에 비추어볼 때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결국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해달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지미 카터가 뜻을 굽히지 않자 핵카드를 빼어든다. 북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핵무기뿐이니, 우리가 그것을 개발하겠다고 카터에게 타협을 시도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반란은 그즈음에 발생한다.

군사쿠데타의 2인자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체제 유지의 시금석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력의 수장은 언제나 대통령의 심복 중 심복이면서 모든 걸 바쳐서 대통령에게 충성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자라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의 수장이 대통령을 배신하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의 당시 발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안가의 소연회에서 당시 자리를 함께했던 경호실장 차지철로부터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 순간적으로 격분해 벌인 우발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합수부의 그러한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합수부 발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었을까?

우선 그날 술자리가 마련되기까지 김재규의 스케줄을 살펴보자. 김재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그날은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된 날이라서 대통령이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한 후 헬리콥터를 타고 귀경하던 중이었고, 경호실장 차지철이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대통령은 평소 궁정동의 안가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안가를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소연회를 준비하라는 차지철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연회 준비를 지시한다.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 모델 신재순을 프라자호텔로 불러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시킨다. 

그러고 나서 김재규는 매우 엉뚱한 전화 한 통을 건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정 총장, 오늘 나하고 저녁 같이 합시다."

궁정동 안가에는 건물이 여러 동 있는데, 김재규는 그중 한 동에 연회를 준비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옆 동에 정승화 총장을 초대했던 것이다. 대통령과 저녁 술자리가 잡힌 마당에 그는 과연 왜 육군참모총장을 부른 것일까?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에게 전화를 한다. 육군참모총장과 저녁약속이 있었는데 갑자기 각하의 소연회 연락이 와서 자리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자기 대신 나가달라고 한 것이다. 완전히 거꾸로 이야기 한 셈이다.

아무튼 그때 김재규는 왜 육군참모총장을 불렀을까? 그건 이미 김재규가 그날 저녁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모든 힘이 육군참모총장에게 가게 되어 있다.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이렇듯 준비된 행동에 미루어볼 때도 합수부의 '우발적 범행'이란 발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김재규는
과연 언제부터 이 거사를
준비했던 것일까?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김재규라는 사람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는지를 살피는 게 중요할 것이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심복 중의 심복이라 생각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김재규는 박정희와 180도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한다. 그는 "박정희의 핵개발은 미친 짓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요청에 의해서 박정희의 뒷조사를 해서 보고한 적이 있을 만큼 은밀하게 미국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던 터였다.

박정희가 핵개발로 미국과 타협을 하려하던 그즈음, 마침 CIA 국장인 터너가 김재규를 미국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때 박정희는 당연히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하는 데 CIA가 힘 써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김재규에게 지시한다.

그때 둘 사이에 오고간 밀담을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재규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워싱턴 정가에는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한 문서가 나돌기 시작하고, 북한이 남한에 비해서 무력이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에 당장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남한이 먹히고 말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가 <워싱턴포스트>에 특종으로 실리고 미국의 정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재규를 연구할 때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인물 중에는 스티브라는 자가 있다. 주한미군 중위로 한국에 부임한 CIA 요원 스티브는 미국에서 유창한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 터너는 미국을 방문한 김재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영어가 너무 서툴다. 속내를 나누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 좋은 사람이 있으니 영어 교사로 써라."

그때 터너가 김재규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이 스티브였던 것이다. 스티브는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수시로 미국 주요 인사들의 생각을 김재규에게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미국을 추종하는 김재규를 스티브는 더욱더 세뇌시키고 조종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김재규는 미국을 믿었고 미국이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사건 이후, 합수부의 심문을 받을 때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절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핵에 대한 이견 외에 김재규가 대통령을 쏜 이유를 하나 더 찾자면 그는 당시 사회상황에 대해서도 박정희와 완전히 다른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 그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선전하는 좌익이나 일부 불순 노동자, 학생만이 아니고, 일반 시민과 중산층이 가담한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항쟁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그는 "이대로는 큰일 난다, 박정희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가 김재규의
쿠데타 도상연습이다

나는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으로 있던 김학호 장군으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감찰실장 김학호는 당시 김재규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부장과 나는 순식간에 한국을 마비시키는 연습을 골백번은 했다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 150명가량을 밤새 연행하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실제 그 리스트를 뽑아서 직원들로 하여금 연행해 오는 도상 연습을 펼치곤 했던 거야. 그때 신호가 뭔지 아나? '김학호, 시작해'였네. 그 한마디만 내게 했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부장이 왜 뜬금없이 우리 집(중앙정보부)으로 오지 않고 육참(육군참모본부)으로 갔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네."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이고 나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같은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난다. 당연히 자신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을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으로 가야 할 터인데, 그는 중앙정보부 100미터 앞에서 차를 꺾어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 벙커로 간다. 

우선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간 박정희를 제거한 후 어떻게 한다는 계획까지 철저하게 짜두었던 그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김재규가 자기 본거지인 중정을 놔두고 육본 벙커로 갔다면, 그것은 이미 정승화와 입을 맞추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렇듯 목숨을 건 거사를 함께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인데, 두 사람은 결코 입을 맞춘 적도, 그렇듯 막역한 사이도 아니었다는 것이 이후 세상에 밝혀진 대로다.

그렇다면 김재규가
그 중차대한 시점에
중정이 아닌 육본 벙커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나는 정말이지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마침내 걸려든 정보 하나, 그것은 바로 김재규의 영어 가정교사 스티브가 문제의 10월 26일 밤 오산 미군 비행장에서 도쿄로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스티브는 실제든 부지불식간이든 김재규를 조종하고 컨트롤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10월 26일, 바로 그날 밤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이 내게는 결코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에 더불어 이제 정말 이 사태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을 나는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당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였던 존 천(John chun)이었다. 

그는 서울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CIA에 포섭되어 미국으로 가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CIA 본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첫 부임지인 도쿄 태평양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중에 한국에서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그때 그에게 떨어진 임무가 한국으로 들어가서 쿠데타 주동자인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박정희는 외부에서 봤을 때는 정말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 출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존 천은 한국으로 날아왔고, 바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이후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박정희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까지 보이면서, 그냥 두면 내 조국 대한민국이 정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에 오로지 나라를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애국심 하나로 봉기한 것이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 눈물의 진정성이 무엇이었든 그에 감동한 존 천은 "박정희는 좌익이 아니다, 빨갱이가 아니고 반공주의자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훌륭한 군인이다. 이번 사태는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벌인 일로 보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고, 결국 미국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용인했으며, 자신은 박정희의 은인 중 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존 천은 아예 한국으로 배속되어 주한미군의 첩보공작 부서에 있게 된다. 물론 뿌리는 여전히 CIA였지만, 는 차츰 승진을 해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가 된다.




한미 정보기관의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 존 천의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맨 왼쪽이 존 천, 가운데 중심인물이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다.

문제는 이 특별한 사람이 어쩐 일인지 10월 26일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9일 전격적으로 전역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당시 그의 행적이었다. 그는 10월 25일에 용산 미군 병원에 입원을 하고 10월 27일에 퇴원을 했는데, 10·26을 사이에 두고 전날 입원을 하고 다음 날 퇴원을 한 셈이었다.

병명도 간단했다
감기

나는 숱한 자료 조사 끝에 이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내 모든 인맥과 정력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마침내 그에게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의 소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에게 접근해 정보를 얻는 것은 정말이지 상식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했던 것이다. (원래 정보계통에 있던 사람은 재직 중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면 처벌받게 된다. 처벌보다 무서운 것은 연금이 박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일단 쌀 수입업자로 위장했다. 내가 한국에 라인을 가지고 있으니 캘리포니아산 쌀을 한국에 수출하자면서 접촉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업자와 무역상의 사이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만남 끝에 마침내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고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사람으로부터 10·26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존 천은 자신의 손으로 살린 박정희를 누구보다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그랬던 그가 왜 갑자기 전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냐고 묻자 그는 내게 '하우스먼' 얘기를 꺼냈다.

하우스먼은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주한미군의 터줏대감으로 한국 정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당시 한국 정치 경제계의 내로라하는 사람치고 이 사람과 연을 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 김영삼 등도 그와 연락하고 있었다고 한다). 존 천은 이러한 하우스먼과도 절친이었다는 것이다. 

그날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 미스터리한 3일을
재현해본다면..

10월 25일 하우스먼은 존 천에게 어디가 안 좋아 보인다고 말을 건넨다. 감기 기운이 좀 있다는 존 천의 말에 하우스먼은 "감기를 그냥 놔두면 몇 달씩 가니까 얼른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빨리 치료하는 게 나아"라고 권유한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존 천에게 예방 차원에서라도 한 대 맞으라며 거듭 권했고존 천은 급기야 부대 내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된다. 

그런데 존 천은 단지 주사를 한 대 맞았을 뿐인데, 깊은 잠에 빠졌고, 일어난 시점은 10월 27일 오전이었다. 이미 그때는 난리가 나서 부대가 뒤숭숭한 상태였다. 지난밤 대통령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존 천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로 하우스먼 사무실로 뛰어 들어간다. 그는 하우스먼의 책상을 다 뒤엎고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며 달려들었다. "미안해, 존 천 미안해. 용서해줘. 뭐든 얘기해, 내가 다 들어줄게" 하는 하우스먼에게 존 천은 "필요 없어, 이 개새끼야" 하며 곧바로 전역원을 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 왜 위와 같은 이상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일까. 존 천의 증언에 따르면 둘 사이엔 앞서 밀약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우스먼은 만약 꼭 그래야만 한다면,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존 천한테 알려주기로 했고, 그러면 존 천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담판을 지을 기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우스먼은 그 약속을 저버리고 존 천을 잠들게 한 후 일을 치러버렸던 것이다. 

김재규가 마지막 순간 항상 쿠데타 연습을 같이했던 김학호 장군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우스먼 역시 마지막 순간 존 천을 잠재우고 일을 치렀던 것이다.

이제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김학호와 존 천, 그 둘이 각자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내게 털어놓았던 이야기까지 종합해보면 마침내 10·26의 배후가 보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좇은 모든 자료와 증언, 정황 증거로 판단해볼 때, 머리가 누구였건 미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김재규로 하여금 육본 벙커로 가도록 지시를 했거나 유도를 했고 (그 연락책이 바로 스티브였던 것),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김재규의 쿠데타는 실패하고, 그간 박정희에 의해 비밀리에 축적되던 모든 핵개발 기술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핵개발을 끝까지 강행하려 했던 박정희와 그걸 막으려 했던 미국과의 충돌. 그것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죽음의 본질이 아닐까?

이것이 풀리지 않는 10·26 당일의 미스터리에 대한 내 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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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시해

여러이야기 2016. 1. 17. 00:03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2109


그날 아침,
경복궁에서 무슨 일이?

명성황후 최후의 비밀을 밝히다
연재일 : 2015.11.12 by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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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노다 후사코 여사는 1914년 도쿄 출생의 논픽션 작가로 어느 것 하나라도 의심이 들면 글을 쓰지 않는, 철두철미한 작가로 유명하다. 2006년 그녀는 자신의 저술이 한국인의 친절 때문에 가능했다며, 책 판매 수익금 전액을 사할린 잔류교포에게 기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녀는 당시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임무는 일본인에게 역사를 반성할 기초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쓰노다 후사코 여사가 한국을 50번 이상 오가며 쓴 책이 <민비 암살>이다.

이 책을 읽던 당시 무엇보다 내 눈에 와서 꽂힌 구절이 있었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들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쓰노다 여사는 이 구절에 나오는 '괴로운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뭔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명성황후의 최후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경복궁에 있던 러시아인 기사 사바친과 궁중수비대 대장이었던 미국인 다이 장군의 증언이 있었지만, 그 둘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감금된 상태여서 직접적으로 문제의 현장을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한다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위안부 문제를 규탄해도, 그들은 그네들을 돈 때문에 자발적으로 군부대를 따라다닌 몸 파는 여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숱한 징용자들에 대해서도 월급명세서를 내보이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온 자발적 근로자라고 우긴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를 대표로 한 정계, 교육계, 언론계가 개입되어 있기에 그러한 교육을 받은 일본 국민들은 우리가 위안부나 징용을 지적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소 저들이 발뺌할 수 없는 팩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민비 암살>의 저 구절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988년에 발간된 <민비 암살> 원본(좌)과 2001년 발간된 <황태자비 납치사건>(우) ⓒ새움출판사

우선 나는 <민비 암살>을 번역한 한국교원대 김은숙 교수를 통해 쓰노다 여사에게 그 구절의 의미와 출처를 물었다. 그녀로부터는 어렵사리 사간(死姦)이라는 말이 돌아왔지만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쓰노다 여사를 압박했고, 쓰노다 여사는 마지못한 듯 7~8권의 자료들을 열거해주었다. 나는 여사가 불러준 책들을 전부 구해 꼼꼼히 살폈지만 더 이상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이분이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후로도 나는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으나, 그녀를 설득할 수도, 그 출처를 찾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쓰노다 여사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내용을 어디에서 보긴 했다는 것이니, 어딘가에 분명이 있긴 하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출처를 찾기 위해 그 방면의 책들을 섭렵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일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가 쓴 <일한병합소사>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시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민비를 참살하고 시체를 능욕했다

쓰노다 여사의 '사간'이 여기서는 '사후 능욕'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 말은 결국 같은 말이었고, 나는 그 구절에 달린 주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이토 백작 문고"

나는 즉각 전화기를 들어 일본의 대학에 봉직하며 나를 돕던 K 교수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자라 일본의 외교사를 전공하는 그는 나의 부탁으로 멀리 후쿠오카까지 오가며 쓰노다 여사가 일러준 자료들을 찾아 살펴왔고 이제는 나 못지않게 그 원전을 찾으려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내 전화를 받은 그는 그길로 달려가 그토록 애타게 추적했던 원전을 찾아내 사본을 팩스로 보내왔다. 1895년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던 밀서가 106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순간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에조 보고서'라 이름 붙은 저 문건을 입수하게 된 경위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에조 보고서'는 무엇이었던가

이 에조 보고서는 당시 조선 정부 내부 고문관으로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실행자 '미우라 공사' 몰래 자신의 직속상관인 일본 정부 법제국 가네즈미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여기에는 '민비 사건'의 발단부터 명분, 모의자, 실행자, 외국 사신, 영향 등이 일본 고어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보고서의 첫 문장이 "미우라 공사에게는 배신의 극치이지만.."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곧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낸다는 뜻이며, 따라서 어떠한 조작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한 셈이다.

"낭인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칼로 두세 군데 상처를 입히고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습니다. 우스우면서도 분노가 치밉니다.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했는데 이 광경이 너무 참혹하여 차마 쓸 수가 없습니다. 궁내대신 또한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野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體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_<이시즈카 에조 보고서> 중에서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본의 만행 역시 원전을 보자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도 잘못되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보고서를 근거로 낭인들이 '민비'를 참살하고 그 시체를 능욕했다고 했는데, 이 원전에는 보다시피 "칼로 몇 군데 상처를 내고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했다"고 적혀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행해진 끔찍한 만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부검사라는 이 한 단어에서 그 실태가 어떠했으리라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과거의 역사를 한스러워 하는 쓰노다나 진보적 역사학자 야마베조차 이 끔찍한 만행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어 '사후'라는 해석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기술한다. 민비를 비롯한 민씨들이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를 가까이하므로 일본으로서는 민비를 제거할 정치적 필요성을 느꼈다는 식이다.

하지만 다 타지 않고 남겨진 국모의 유해가 경회루의 연못과 우물에 버려져 유실됨으로써 2년 후 장례조차 빈 관을 놓고 치러졌다는 슬픈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어떠한 정치도, 외교도 없었던 것이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외국의 정부와 사절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 이하 경복궁에 난입한 39명 전원을 체포해 히로시마 형무소에 가두고 재판을 열었다. 그 재판은 물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고 살해범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이제 이 사건을 우리나라 검찰에서 기소하고, 우리나라 법정에서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리적으로 불가하다 넘길 일이 아니라 이러한 진상을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알려 온갖 논리로 호도되고 있는 <조선 진출>의 본질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진명

덧붙이자면, 나는 이를 주제로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썼었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읽고 격려해주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일본인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었다. 일본인 중에도 이런 사실을 알기만 하면 누구보다 앞서 반성하고 사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일본에서의 출판을 추진했었지만 그것은 결국, 번역까지 마쳐진 상태에서 우익의 협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NHK는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소개하는 칼럼을 싣는 것만으로도 하타 전총리와 뭇 언론으로부터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한일 간의 올바른 역사를 저들에게 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작없을 끝없이 이어가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과거사의 정리이며 다음 세대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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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

여러이야기 2016. 1. 16. 23:57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865


역사조작, 전쟁도 불러온다

광개토태왕비의 사라진 세글자


광개토태왕비(호태왕비好太王碑)는 서기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비이다.

수백 년 세월을 압록강 건너 편 중국의 지안[集安] 땅속에 묻혀 있던 이 비는 큰 비가 와 흙이 대거 쓸려나간 후 돌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비에 비해 워낙이 크고 웅장했던 이 비는 표면이 무척이나 거친 데다 높이는 성인 네 사람 키 정도로 탁본 뜨기가 매우 어려워 북경에서도 희귀품으로 거래되었다.

어느 날 이 비의 탁본이 일본의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헌병 중위)에 의해 일본 본토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때였다.

군국주의자들에게 가게노부가 가져온 탁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곧 이를 통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조작해내게 된다.

'임나일본부
(任那日本府)'란
무엇인가?



광개토태왕비. ⓒ 김진명

일본에는 7세기 경 편찬된 <일본서기>라는 책이 있다.

그 책 속에 과거 일본이 '임나'라는 나라를 지배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들은 바로 이 '임나'를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 기사에 끼워 맞춘 것이다.

문제가 되는 신묘년 기사 부분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이육년병신왕궁솔수군토벌잔국)

동그라미 표시된 저 세 글자는 비에서 지워졌는데 세 글자 중 마지막 자에서 근(斤)이 보이기 때문에 신(新) 자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 놓고 보면 이 구절은,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이 두 글자에 임의로 '임나'를 끼워 넣고는 이렇게 해석한다.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호태왕은 즉위 6년째인 병신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

도대체 저기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두 글자를 임나라고 써넣을 생각을 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저렇듯 보이지 않는 두 글자를 '임나'라고 써넣고는 자국민들을 교육시켜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 진위를 의심받는 역사책 속에나 존재했던 나라 임나는 한반도 안에서 백제, 신라와 같이 어우러져 있었고 일본은 이곳 임나에 '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한국 사학자들의 반격

이러한 억지 주장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이 확실한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했던 것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무엇인가를 격파했다는 저 구절의 한자 해석이 문법이나 문장구조상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왜가 주어가 되면 파의 목적어는 백제, ○○, 신라가 된다. 한국 학자 중에는 목적어 ○○는 임나가 아니라 가야라고 해석하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 이조차 있었다)

여하튼 한국의 사학자들이 별다른 대응을 못 하고 일본은 전후에도 교과서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전국민에게 교육시키던 중, 뒤늦게 재일(在日) 사학자인 이진희 씨가 놀라운 발표를 한다. (1972년)

일본이 광개토태왕비에 석회를 발라서 글자를 조작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른바 '석회도말론'이 그것이다.

그동안 일본의 억지 주장에 제대로 대응 한번 못 하고 있던 한국의 사학자들은 그러한 발표가 나오자 환호성을 터트렸다.

한국의 신문에서도 이 기사를 1면 톱으로 보도하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오랜만에 질타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문이 쏟아지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알 만한 유명 사학자 대부분이 동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가 최인호 씨는 이를 바탕으로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소설을 쓰고 '조선일보'는 그것을 연재할 정도였으니, 적어도 한국에서는 석회도말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석회도말론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진희 씨는 여러 장의 탁본을 비교하며 來渡海(래도해)의 세 글자가 탁본마다 조금씩 다르니 일본인들이 석회를 발라 조작해냈다고 주장했지만, 석회는 우리 모두가 잘 알듯 물에 잘 녹는다.

백 년 전 석회를 발라 조작을 한 것이 비가 많이 오는 그 지역에서 아직도 건재하다는 주장을 나로서는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한중 수교가 되어 중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마자 바로 지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직접 광개토태왕비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땐 지금처럼 차단시설이나 감시 따위가 없어 비의 표면을 하루 종일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일본이 글자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때로부터 이미 백 여년 세월이 흐른 뒤였음에도 '來渡海(래도해)'라는 세 글자는 그야말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석회도말론'은 엉터리였던 것이다.

그즈음에도 한국에서는 '석회도말론'을 바탕으로 한 논문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던 터였다.

그러한 주장은 오히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 측 주장대로 석회를 발라 조작한 적이 없으니 조작 사실이 없다는 강변만으로도 손쉽게 역사 왜곡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찾겠다는 결심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난 뒤, 비 앞에서 진실을 찾겠다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비와 관련된 남한, 북한, 일본, 중국의 자료와 서책들을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 모든 연구자의 머릿속을 다 들여다보면 안 보이는 두 글자를 유추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집념으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던 내 눈에 마침내 호태왕비의 중국 측 권위자인 왕건군(王建群)의 저서가 눈에 들어왔다.

 왕건군은 자신의 책 말미에 참고자료들을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싣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속에 경천동지할 광개토태왕비의 저본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저본은 어떤 변화가 있기 전 맨 처음 보이는 그대로를 기록한 걸 말하는데 흔히 초본, 혹은 초록이라고도 한다.

어떻든 수많은 다른 책 중 한 권이겠거니 하며 펼쳐 든 그의 책 부록에 기적처럼 저본이 붙어 있었고 저본에는 안 보이는 글자 중 첫 자가 동녘 동(東) 자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비문. ⓒ 김진명
그렇다면 이 저본은
어떻게 남게 되었을까?

저본은 초균덕(初均德)이라는 이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그는 별명이 초대비라 불릴 정도로 광개토태왕비를 끼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 세상에 나온 광개토태왕비가 짙은 이끼에 덮여 탁본을 하기가 힘들자 비에 말똥을 발라서 태워버렸고, 이 탓에 비는 표면이 갈라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유실된 글자들에 더하여 추가로 여러 글자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그는 비를 태우기 전 그때까지 보였던 글자들을 종이에다가 한 자 한 자 또렷이 옮겨 적어 두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본을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조카딸에게 맡겼고, 이것이 50년 이상 그녀의 다락방에 두터운 먼지를 쓴 채 방치되었다가, 초균덕의 가계를 추적했던 왕건군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내 그의 저서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왕건군은 한일 간에 비의 해석을 두고 처절한 전쟁이 붙어 있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 저본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각종 저서에서 문제의 그 구절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으면서도 이 저본에 있는 가장 결정적 한 글자 '동'을 언급하지도, 그 저본에 따라 해석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저서 부록에 여러 잡다한 자료와 함께 이 저본의 필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그의 행태로 보아 실수라고 밖에는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안 보이는 두 글자 중
첫 글자가 東(동)이라면
비의 해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일본은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 백잔임나신라 이위신민'이라고 해서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임나' 자리에 '동'이 들어간다면 그런 해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동으로 시작되는 나라는 없으므로 주어는 자연히 백제가 되어버리고 동(東) 다음에는 정(征), 벌(伐), 침(侵) 등의 동사가 온다.

즉 '백제가 동으로 신라를 쳐서 신민을 삼았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구절 '그래서 병신 6년에 대왕(광개토태왕)은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이 아닌) 백제를 토벌했다'와 꼭 맞아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東(동) 자 하나만으로도 일본의 임나일본부 조작이 드러난 셈이었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그걸 섣불리 발설할 수가 없었다.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제법 알려지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일개 소설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사라진 글자 중 하나가 東(동) 자라고 주장한다 한들, 그러한 주장을 일본은 커녕 우리 역사학계조차 주목할 리 없었다.

하여 나는 이러한 주장을 한국과 일본 학계에 동시에 알릴 생각으로 <몽유도원>(원명 가즈오의 나라)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 <몽유도원> 본문. ⓒ 새움출판사

그리하여 마침내 東(동) 자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석회도말론'을 주장하던 논문들은 그 주장의 근거를 잃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연구 일인자와의 만남

소설이 나온 후 나는 이 東(동) 자를 가지고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연구 일인자를 찾아갔다.

그때 그는 동경대학교의 동양사 실장(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귀한 탁본을 다섯 장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봐란 듯이 탁본들을 바닥에 좍 깔며 도대체 어디에 비를 조작한 흔적이 있냐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비의 조작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견해에 동조했다.

어리둥절해진 그에게 나는 천천히 저본을 내밀며 東을 짚었다.

깜짝 놀라 저본의 글자들과 탁본의 글자 1,775자를 한 자 빠짐없이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저본의 신뢰성을 완전히 확인하고 난 그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온 인생을 바쳐 광개토대왕비를 연구해온 그에게 이 동의 출현이 크나큰 충격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한 후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학자란 진실 앞에 목숨을 거는 존재가 아닌가, 일본 최고 지성인 동경대학교 학장으로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연거푸 세 대의 담배를 피웠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입에서는 이윽고 회한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내가 기대한 이상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 임나를 집어넣는 건 맞지 않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데 내년부터 내 책에서 임나일본부를 빼고 다른 저자들에게도 권고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필두로 작년에 이르러 모든 일본의 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가 완전히 빠졌으니 이 허구는 생성부터 폐기까지 꼬박 130년이 걸린 셈이다.

임나일본부와 같은
역사 조작은
단순한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역사 조작이 무서운 건 이것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결국은 침략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군국 일본은 광개토태왕비를 악용해 임나일본부라는 말을 만들어냄으로써 자기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세웠고 이에 따라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 김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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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왜 대한(韓)민국일까?


우리나라의 국호 '韓' 대한민국, 한국, 한반도, 한국인. 우리가 국호로 쓰는 '韓'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韓. shufa.m.supfree.net
우리나라의 국명은 '한국’ 정확하게는 '대한민국'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나라 이름이 왜 한국인지, 이 반도가 왜 한반도인지, 우리가 왜 한국인인지, 그리고 이 '한(韓)'이라는 글자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꼭 알고 싶었다. 

그러나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자료를 찾아봐도 '한'의 근원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이라는 글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깝게는 <제헌국회 회의록>에서 우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채택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심원한 뿌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가장 처음 '한'이라는 글자를 국호에 쓴 건 대한제국이다. 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었는지는 <조선왕조실록> 중 <고종실록>에 잠깐 나와 있다. 

확고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의의인즉 '삼한을 잇는다'는 뜻으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택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대한제국이 뿌리가 되어 대한민국, 한국, 한반도가 되고 우리가 한국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는 모순된 면이 있다

마한, 진한, 변한을 의미하는 삼한이란 무엇인가? 

한반도 남부에 변변히 나라다운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짧은 시간 왜소하게 존재하다 백제, 신라, 가야에 병합되었다는 씨족 수준의 사회가 아닌가.

새로운 국명을 지을 때 예전에 있던 나라의 이름을 이어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웅장하고 화려했던 과거를 계승하기 위함이다. 

왕건의 고려는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어졌고, 이성계의 조선은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실제 명칭은 조선)을 잇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삼한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한제국이라고 했다면, 삼한이 거대하고 큰 나라여야 논리에 맞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나라로 인정해 주지도 않는 작은 씨족 사회에 불과하다. 

그 당시 조선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는데 한반도 남부의 조그마한 삼한을 잇겠다고 대한제국이라고 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삼한에 대해 우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일부 과거의 역사서들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고조선의 큰 나라들로 나와 있지만 나는 가급적 이단으로 몰려 있는 책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좀 더 크고 깊은 곳에서 삼한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형식논리적으로 한국이 있어서 남한, 북한이 있는 것처럼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나라도 원래 한이라는 원천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삼한이라는 국명을 찾아보았다.

삼한이라는 국명은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나오는데 역사라든지 강역이라든지 하는 설명은 아무것도 없이 단지 그 풍습에 대해 짧게 나오는 게 하나 있고, 우리 <삼국사기>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정도의 내용이 있다.

이토록이나 기록이 없자 '삼한'이 되었든 '한'이 되었든 '한'이라는 글자를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신념이 나의 가슴속 깊숙이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는 문집이든 사서든 혹은 일개 서간이든 역사상 '한'이라는 글자의 맨 처음 기록을 찾아봐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너무나 뜻밖의 서적에서 이 세상 최초의 '한'을 찾아냈다.

시경이 기록한 우리의 고대 국가 '韓' 중국의 명저 사서삼경 중 한 권인 '시경 - 한혁편'에는 '한후(韓侯)'가 주나라 선왕(기원전 827-782)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韓'은 춘추전국시대 동명의 '韓'이 세워지기 400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시경. WIKIPEDIA. Classic of Poetry
놀랍게도 이 '한'이라는 글자는 중국의 사서삼경 속에 있었다

사서삼경 중에서도 공자가 으뜸으로 칭하던 <시경>에 이 의미심장한 글자 '한'이 있었다. <시경> [한혁편]의 '한후(韓侯)'가 그것이다. 

'후'는 우리 모두가 알듯이 제후,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후'라는 단어는 '한이라는 나라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수많은 학자들 중 이 '한후'가 혹시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시경>은 워낙 오래된 중국 책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국가는 은나라지만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나라는 주나라이다. 거기에 더해 <시경>은 주나라 초기에 나온 책으로 중국 역사의 태동기에 나온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책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라, 고구려, 백제부터를 역사시대로 가르치고 그 이전은 고조선으로 뭉뚱그리고 있다. 

그 고조선은 곰에게서 태어난 단군 할아버지가 다스렸다는 식의 전설로 버무려 놓고 있기 때문에 이 까마득한 시절에 등장한 한후가 우리의 조상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하는 것이다.

<시경>에 나오는 한후의 나라 '한'을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국 칠웅 중 하나인 '한(韓)'이라는 나라로 설명한다. 내가 답변을 들어본 수많은 교수들 역시 한결같이 이 한을 춘추전국시대의 한이라고 답변했다. 

한 씨 성(姓)을 쓰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성을 대부분 '나라 한'이라고 대답하는데, 어느 나라 한이냐고 물으면 대개 잘 모르지만 그중 족보에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한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시경>에 나오는 한후는 중국 주나라 선왕 때 주나라를 방문한다. 이 주나라 선왕은 기원전 827-782년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한편 춘추전국시대의 '한'은 기원전 403년에 건국된 나라이다. 연대를 따져보면 모순은 즉각 드러난다. 모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학자와 교수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 한후라는 사람의 나라 한은 과연 어떤 나라인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어떤 역사서를 보아도 이 '한'이라는 왕조는 춘추전국시대의 그 한밖에는 없다.

'한'이라는 나라는 있으되 중국의 왕조가 아니라면?

형식논리로 본다면, 그 '한'은 중국의 왕조가 아닌 어떤 다른 민족의 왕조인 것이다. 아무래도 이름이 같은 우리나라 '한'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기록도 없이 그런 주장을 펼칠 수는 없어 나의 염원은 상상 속에서만 머물러야 할 듯싶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나는 중국 동한 시대의 왕부라는 대학자가 쓴 <잠부론> '씨성편'에서 어마어마한 기록을 만날 수 있었다.

왕부라는 학자는 중국 한(漢)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이다. 그의 <잠부론>은 세계의 100대 명저에 꼽히곤 하는데, 그중 '씨성편'은 성씨의 기원을 기록한 책으로 그는 그제까지의 모든 기록을 섭렵해 성씨의 유래를 기록해 두었다.

'씨성편'에서 왕부는 한씨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한후가 언급되고 있다. 그대로 옮기자면 '<시경>에 나오는 한후의 후손은 위만에게 망해서 바다를 건너갔다'라고 쓰여 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듯이 위만에게 망한 사람은 고조선의 준왕이다. 그리고 한후의 후손이 건너간 바다는 바로 서해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고조선은 일본인들이 짜준 각본처럼 한반도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의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위만에게 망한 한후의 후예는 고조선의 준왕이었지만 그로부터 약 800년 전에 존재했던 조상이 조선후가 아니라 한후라는 명칭을 쓴 걸 보면 고조선의 과거 국호가 '한(韓)'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김진명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그것은 우리 국호의 유래와 의미부터 아는 일이 아닐까?'하여 첫 이야기를 우리 국사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국호 '한(韓)'에 대해 다루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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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염색체에 의해서 성별이 결정된다. 그런 만큼 한 번 성이 결정되면 뒤바뀌는 일은 없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는 인간 세상보다 훨씬 복잡한 일들이 일어난다. 많은 동물이 일생 중 자신의 성별을 한 번 이상 바꿀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번식 전략이 숨어있다.

스미스소니언 열대 연구소(Smithsonian Tropical Research Institute, STRI)의 과학자들은 매우 독특한 성전환 방식을 가지고 있는 흰삿갓조개류의 일종인 크레피둘라 마지날리스(Crepidula cf. marginalis)의 성전환 기전을 연구했다.

크레피둘라는 평범한 외형을 가진 조개류로 바닷가의 바위에 붙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생물체는 태어날 때는 모두 수컷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크기가 커지면 암컷으로 성전환을 시도한다.

참고로 수컷의 생식기는 자신의 몸길이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 암컷으로 전환할 때는 이 수컷 생식기가 퇴화하고 대신 암컷 생식기가 새롭게 생겨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보통 수컷은 큰 껍질을 지닌 암컷 위나 옆에 붙어살아 간다.

이런 독특한 번식 전략을 가진 이유는 아마도 알을 낳을 수 있을 만큼 자라기 전까지 수컷으로 자손을 남기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미성숙한 어린 개체라도 수컷으로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큰 이후에는 암컷으로 전환해서 알을 낳는다. 따라서 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길어지는 장점이 있다. 아마도 이 장점이 성전환에 필요한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눈이나 다른 감각기관이 없는 이 연체동물이 어떻게 상대방의 크기를 비교해서 성전환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크레피둘라가 물속으로 화학 물질을 분비해서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했다. 실제로 성전환을 하는 어류들은 화학 물질을 분비해 신호를 주고받는다.

연구팀은 크기가 서로 다른 수컷을 서로 그물망으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실험 수조에 넣고 관찰했다. 그리고 대조군은 그물망으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자연상태처럼 서로 접촉이 가능하게 두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접촉에 의해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이 관찰되었다. 다시 말해 수컷 두 마리가 서로 접촉을 하면 하나가 암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 더 큰 암컷이 없을 때)

이는 과학자들에게도 매우 놀라운 결과였다. 아마도 이런 번식 전략이 생겨난 이유는 이 동물이 일단 자리를 잡으면 바위에 붙어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접촉이 가능한 거리에 있는 개체끼리 번식을 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자연의 신비는 종종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지만, 이 경우에는 너무 많이 초월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Rachel Collin/ST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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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누워 있다고’ 눈치주지 마세요

- 눕기는 신체에 가장 적은 저항을 주는 자세

- 누워서 멍 때리는 시간은 창의적 사고의 ‘결정적 순간’

[헤럴드경제=원호연기자]“공부하는 애들 분위기 흐리지 말고 나가서 운동이라도 해.”

휴일을 맞아 거실 소파에 누워서 쉴라치면 어머니 혹은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게을러 보이게 누워있지 말고 생산적인 일을 하라는 재촉이다. 그러나 눕는 것이 오히려 생산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국 사회가 빠른 경제성장을 한 것은 ‘저녁이 있는 삶’을 포기한 채 일해 온 직장인들의 애환이 숨어 있다. 최근 발표된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노동시간은 연간 2124시간으로 멕시코의 2228시간 다음으로 많다.

이처럼 쉴새 없이 일하는 한국인들은 휴가철이나 모처럼 찾아온 명절 연휴에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다. 서점가에서는 연휴나 휴가 동안 읽을 책 목록을 빼곡히 적어 들이밀고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연휴 집중 크로스핏 강좌를 홍보하는 문자를 보낸다. “추석 연휴 3일이 수능 점수를 결정한다”는 말에 수험생들은 시골집 대신 학원으로 향하고 직장인들마저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대신 어학공부나 성형 수술 등 ‘결과물이 남는 것’에 매진한다.

그러나 휴식을 위한 연휴에 무리한 활동을 하다가는 몸과 마음을 다칠 수 있다. 평일에 운동하지 않다가 연휴나 주말에 운동을 몰아서 하는 이른바 ‘위켄드 워리어’들은 심혈관계 질환이나 당뇨병, 관절염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연휴 기간마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번아웃 증후군’으로 이어질 수 있다.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면 무력감과 자신감 저하, 불만 등 정신적 증상은 물론 두통과 근육통을 겪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등 육체적인 손실도 가져온다.

‘눕기의 기술’의 저자 베른트 브루너는 잠시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는 “127도 정도로 편히 기댄 자세로 거의 누운 상태가 척추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가장 알맞다”며 라운지체어 등에 편히 눕기를 권한다. 미국 국립수면재단은 “침대에 누워 잠시 쉬는 것은 실제로 잠을 자지 않더라도 휴식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누워 있다고 해서 전적으로 비생산적인 것만은 아니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 대표작들을 청동 침대에 누워 쓴 것으로 유명하다. 마크 트웨인이나 윌리엄 워즈워스 등도 마찬가지였다.

의학계는 ‘눕기’가 창의적일 수 있는 이유를 뇌 과학에서 찾았다. 미국 워싱턴 대학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클 교수는 2001년 실험을 통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에 우리 뇌의 안쪽 전두엽, 바깥쪽 측두엽과 두정엽 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것을 뇌 영상 장비로 확인했다.

그는 이들 부위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로 명명했다. 이 부위들은 평소 활발히 인지활동을 할 때는 서로 연결되지 않던 부위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서로 동떨어진 정보를 연결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것이 후속 연구들의 설명이다. 결국 ‘누워서 멍 때리는 순간’이 창의적인 사고가 나오는 ‘결정적 순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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